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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 중 사색 - 시선의 자유함

-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때, 모방하지 않는 나만의 삶을 살수도

by 해야블라썸 Nov 1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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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수준은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닌,
무엇을 부끄러워 하느냐로 알 수 있다.

-김수현,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중에서


20년이 다 되어가는 제주 여행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전까지 내가 해보지 못했던 경험을 하게 만든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그 경험 중 하나가 바로 길가 시식~. 


길을 걷다 수박 장수가 보이면, 과일 하나 고르는 것도 어설펐던 우리는 잘 익은 녀석으로 추천을 받아서 샀다. 우리가 메고 있는 큰 가방과 그 가방을 내려놓을 때 보이는 등부분의 땀에 젖은 티셔츠. 과일 장수는 우리에게 그 자리에서 당장 수박을 깨어먹을 수 있도록 말하지 않아도 도와주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수박 하나 살려면 족히, 율곡 이이님(5천원권 지폐 인물) 한 분으로는 어림도 없고, 두 분이 되거나 그 이상이 되어야 살 수 있던 녀석인 데, 길 가에서 마주하는 수박은 율곡 이이님 한분이 아니라 그의 스승님 퇴계 이황(천원권 지폐 인물) 한 두 분이면 족했다.   


도보여행자에게는 도매가로 판매하는 게 원칙인 것인지, 길 가에서 마주한 어느 과일 장수이든 간에 도심의 마트에서 볼 수 있는 가격으로 판매를 하셨다. 내 얼굴만한 참외는 학 한마리(오백원 동전 그림)면 족했다. 아무리 이렇게 싼 가격이라 하더라도, 길가 시식은 또 다른 일이었다. 다 큰 처자 둘이 길거리에 퍼질러 앉아서 과일을 먹는 일은 과히 1일 동물원 원숭이 역할 체험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길거리에서 과일을 먹고 있으면 지나가던 운전자들은 신기한 듯 차를 세우면서까지 우리를 쳐다보았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고 했던가? 이 시절(2005년 당시) 싸이월드에도 절망이 없었던 거 같다. 헤어진  연인에게든, 오랜 시간 못 만난 동창이든, 학업이나 취업으로 연락이 뜸해진 친한 친구이든 간에, 그 시절의 우리는 싸이월드로 안부를 전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 안부에는 나 지금 힘들어보다는 은근히 나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긍정의 내용이 더 많았다. 맛집 다니면서 찍은 음식 사진이나, 여행지에서 한 컷 폼 잡고 찍은 사진, 혹은 멋진 카페 어둑한 조명 아래서 평소와는 사뭇 다르게 분위기 잡고 찍은 사진 등으로 미니홈피를 채우는 일이 그때의 즐거움이었으니 말이다.


속살거리고 싶은 은밀한 이야기나 아무에게나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진들은 일촌 설정을 하면 어느 정도 노출에 제한을 둘 수 있어 범위만 한정되었을 뿐 우리는 그때부터 나와 친한 타인이든 파도타기로 만나게 되는 친하지 않은 타인이든 간에 타인의 삶을 엿볼 수가 있었다. 그렇게 타인의 삶을 엿보면서, 나도 알게 모르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게 된 듯했다. 그러다 보니, 커피 한잔 마시는 것도, 친구와 가볍게 밥 약속하는 것도 , 어디 놀러 한번 가는 것도 모두 싸이월드에 올릴만한 사진이 찍힐 만한 것인 가가 은근히 약속 장소를 정하는 데 영향을 끼쳤던 거 같다. 


미니홈피에 올리는 사진은 폼나는 것이어야만 했다. 사진 한 장으로도 침이 고일만한 음식 사진이나, 여행지 배경과 어울릴만한 멋진 포즈의 내 모습이 닮긴 사진, 혹은 내 미모를 최선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조명이 있는 카페 사진이나 내 취미생활이 고급지거나 수준 있게 보일만한 사진 등. 실제의 나는 그리 멋지지도 않았지만, 멋진 사람이 되는 것이 생각보다 조금 쉬웠다. 최대한 나를 멋지게 보여줄 수 있는 사진 한 장이면 되었으니까...


타인의 사진도 그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한참 비싼 디카를 들고 사진 찍는 각종 온오프라인 모임들이 많았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방하는 삶이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내 삶은 이렇게 너에게 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픈 그 무엇의 시작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절망이 없는 온라인 세상이 그 시절부터 만들어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딜 가나 꼭 사진을 찍어야만 했고, 싸이월드에 올려야만 했다. 난 정말 잘 살고 있다...로 보이고 싶으니까. 실제로는 절망 가득한 삶을 살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실제로는 홈피 한 공간에 힘들다고 푸념하는 일기를 매일 쓰면서 아무도 못 보게 꽁꽁 닫아놓았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제주도 여행으로 내가 달라졌다. 사진을 보고 있자니, 정말 멋없게도, 어찌 보면 조금 품위 없어 보이게 길거리 트럭에서 참외를 사서 깎아먹고, 수박을 사서 깨 먹고, 지정된 자리도 없는 길거리에 앉아서 짜장면도 먹고 있다. 누군가의 멋진 모습을 시늉하는 사진들이 아니라, 더위에 지쳐 갈증 났던, 너무나도 배가 고파 참을 수 없었던 그 시간, 그 순간의 진솔한 내 모습을 담고 있었다. 


이 여행 전에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던 내가 일상에서 감히 벌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도보 여행자로서 이곳에서만은 오롯이 낯선 이방인이 될 수 있음이 누군가를 모방하지 않는 삶으로 이끌었다. 여행 중의 갈증과 배고픔도 한 몫했다. 당장 보이는 것을 움켜잡지 않으면, 언제 갈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기에 이 여행 때만큼 빠르게 결정하고 행동한 적이 없는 거 같다.


그 시작은 여행 3일 차부터였다. 약간은 멋으로 시작한 도보여행이, 절대 겉멋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된 날이었으리라. 하루 종일 걷는다는 것은 일종의 전쟁, 일종의 싸움이었다. 눈살 찌푸리게 만드는 태양과의 싸움이기도 했고, 목에서부터 타고 올라오는 입술 타는 갈증과의 싸움이기도 했으며, 때론 식당이 보이지 않는 지난한 해안가를 걸을 때면 배고픔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결국, 나의 본능과 무수히 부딪히면서 참고 견디며 어르고 달래어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결코 평온하지만은 않은 행보였다.


외모적으로는, 자외선에 압도되어 의문의 1패, 배낭 멘 자세로 배 나온 앞볼록에서 뒷볼록이까지 되어 의문의 2패, 땀에 젖은 티셔츠와 모자에 눌린 헤어스타일로 의문의 3패를 당한 모습이었음에도 이 도보여행이 가장 좋았다고 싸이월드에서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타인의 삶을 모방하여 어떤 멋짐의 경계로 들어서려 했던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서 해방되어 온전히 나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지금 아닌 그 이후라도 싸이월드 어디선가 나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제주 여행에서는 그 시선을 놓아버렸다. 심지어, 우리의 행동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타인마저 있었지만, 그들을 앞으로 다시 만날 확률은 내가 지금 서 있는 땅의 지구 반대편 사람들을 만날 확률과 같다고 생각하니 타인의 눈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걷고 있던 그 순간에는 타인의 시선보다 내 목마른 갈증이, 내 배고픔이 더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본능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모습은 이 여행 중에서 빠뜨릴 수 없을 내 모습이 될 것이라고 예감했던 거 같다. 싸이월드의 기록으로 남을지 안 남을 지는 중요치 않았다. 갈증의 해결책이 되어 나타난 과일 트럭을 눈을 감고 지나치도록 내 본능이 허락지 않았다. 심지어, 식당 하나 보이지 않는 길에서는 본능의 아우성이 더 커져 보이지 않는 식당을 소환해서 짜장면을 시켜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 쯤되니 그 이전의 나는 대체 왜 타인을 의식하며 내가 먹고 싶은 음식 하나 맘 편히 먹지 못했을까? 멋진 카페나 식당의 그 무엇이 아니면 왜 부끄러워했을까? 왜 그리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타인의 그 무엇인가를 모방하려 했던가? 모방한 행태가 아니면 왜 부끄러워했던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이 여행을 하는 동안 길거리에 앉아서 수박을 깨어 먹고 있는 우리를 신기한 듯 쳐다보고 지나가는 운전자들이 꽤나 있었다. 싸이월드의 기록에 의하면, 차까지 세우고서 우리를 구경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적혀있다. 우리처럼 먹고 싶다는 건지, 우리 먹는 모습이 노숙자처럼 보여 불쌍했던 건지, 아니면 길거리에서 시식하는 우리 모습이 혐오스러운 그 무엇이었는지 그 시선의 의미를 정확히는 알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따라하고 싶은 멋진 모습은 아니었을 거다. 마치, 백화점에 허름하게 옷을 입고 가면 대접받지 못하는 것처럼, 외적으로 멋지지 않은 모습이면 낮은 사람으로 치부하거나 하대하는 우리 사회. 번드르르 멋지지 않음은 나쁜 것처럼 인식되는 우리 사회. 그런 인식이 내 머릿속에도 남아 조금이라도 멋진 타인을 모방하지 못하면, 스스로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게 된 건 아닐까?


그러다 보니, 이제는 타고난 생김새까지도 평가의 대상이 된다. 이쁘지 않으면 부끄러운 거였던가? 그 얼굴이 부끄러워 성형을 하고, 시술을 받고, 짙은 화장을 하여, TV 속 누군가와도 닮은, 잡지책 속의 누군가와도 닮은, 유명 SNS 속의 누군가와 닮은 얼굴, 비슷한 옷차림새, 비슷한 화장을 해야지만 홀대나 차별을 당하지 않는 맘 편해지는 세상이 되었다.


그 닮은 얼굴로 그럴듯한 체면을 세워줄 차를 몰고서 유명하다는 맛집, 고급스러운 호텔이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여행을 하고 사진을 찍어 올려야지만 남 부끄럽지 않게 사는 인생이 되어버린 듯한 요즘. 이래야만 부끄럽지 않고 당당한 것은 또 뭔가? (물론, 그럴 만한 수준을 갖추기 위해 한 노력은 과히 칭찬할 만하다.)


정작 나를 멋지고 당당하게 만드는 것은 내가 소유하고 갖춘 것들이 아니라 그것을 지닌 나의 태도이고 자세이고 매너임에도 나는 그것을 종종 잊고서, 남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수준으로 내가 갖추지 못한 것 때문에 부끄러워할 때가 많았다. "갖추다"의 기준도 타인의 시선에 의한 타인들이 만든 기준으로. 그러다보니, 그러한 시선을 충족시킬려고 열심히 사는 꼴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선의 수준은 경쟁하는 사진 속에 날이면 날마다 높아지기 일쑤여서 좀처럼 내가 가진 것에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내가 갖지 못한 것에 절망감을 주기 일쑤였다. 행복할 수가 없었다. 


길거리에서 수박을 하나 깨 먹고 참외를 하나 깎아먹는 행동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그것을 먹고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행위. 노점상인이라고 직업의 귀천을 따지며 사람 자체를 낮게 보는 그 태도. 그런 것들이 부끄러운 것이다.


이쁘면 좋겠지만, 뙤약볕에 흐른 땀으로 화장이 다 지워지고 기미가 생기고 점이 생긴 내 얼굴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내 팔에 수없이 빽빽하게 생긴 점들이 부끄러운 그 무엇은 더더욱 아니다. (사실, 도보여행 때마다 얻게 된 수많은 점들은 값진 경험 끝에 얻어낸 내 삶의 훈장과도 같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화장하지 않은 민낯, 품위 있지 못한 모습으로 게걸스레 무언가를 먹는 모습, 번듯한 식당이 아닌 곳에서 식사를 하는 모습이 아니다. 화장으로 나 자신을 가리지 않으면 떳떳하지 못하고 쭈그러드는 내 마음, 수없이 남의 SNS 속 사진과 비교하며 남들이 인정하는 맛집이나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하는 식사가 아니면 내세울 것 없이 작아지는 내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여행 후 어찌 변화되었냐고 궁금해하실 수도 있겠다. 길거리서 참외 하나, 수박 하나, 심지어 짜장면까지 먹었던 나는 주저 없이 이 사진들을 싸이월드에도 올렸다. 전혀 부끄러운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꼭 멋짐 폭발하는 사진 속의 나만 내가 아니라, 남들이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 모습까지도 나였고, 나는 그 모습 속에서 타인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로웠던 단단해진 나를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굳이 절망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싸이월드에 남겨진 기록을 보며 절망을 기록했다고 생각했을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가 뭐래도 내가 절망하지 않은 것이면 절망이 아니다. 멋지게만 보이려고 힘들게 노력하지도 않는다. 반백년 가까이 살아보니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는 게 내 지론이다. 더 뛰어난 것 같아도 보이지 않는 부분의 아픔이나 상처가 있고, 더 잘 사는 것 같아도 보이지 않는 부분의 가난이 있다. 내 마음이 편안하고, 평안하면 그걸로 됐다. 남의 시선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나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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