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는 고양이 두 마리가 산다. 러시안블루와 아비시니안. 걱정 없이 살라는 의미로 ‘하쿠나마타타’를 빌어 각각 하쿠, 마타라는 이름이다. 하쿠는 멍충미 넘치는 순둥이, 마타는 곁을 잘 주지 않는 새침데기다. 하지만 마타는 식탐이 많아끼니 때면 세상 애교 넘치는 자본주의 무릎냥으로 바뀐다.
둘은 요즘 몇 시간이고 창가에서 하염없이 봄볕을 쬔다. 거리의 풍경을 살피고, 날아가는 비둘기를 좇아 까딱까딱, 함께 고개를 흔든다. 시계추 같다. 까딱까딱, 오후가 흐른다. 녀석들은 창가를, 집사의 눈길은 녀석들을 떠날 줄 모른다. 구름 없는 하늘과 포근한 볕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재작년 가을 태어난 녀석들에게는 두 번째 봄이다. 첫 봄이 왔을 때 녀석들 앞에서 떠올리던 상념이 스친다. 순수를 그린 듯한 풍경 앞에서 나는 주저했다. 같이 어울려도 괜찮을까. 다시 오지 않을 처음이라는 이름의 봄 앞에서, 나 혼자 잿빛인 건 아닐까. 녀석들의 봄을 망치게 되진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녀석들은 "기운 내요 아빠"라는 표정으로 집사의 얼굴을 살폈다. 온기가 돈다. 물론 그저 그렇게 보고 싶었던 거겠지. 집사의 고민 따위 고양이가 알아줄 리 없고 실은 "오늘은 왜 캔이 없니"라는 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생각조차도 점차 위로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고양이의 시선에서, 상자 밖에서 내 문제를 들여다보면 어쩌면 작은 캔 하나 무게에도 미치지 못할 수 있다. 그렇게 가벼워졌다. 비좁은 머릿속에 갇혀 있는 생각과 감정들을 왜 깨지 못했을까. 녀석들이 내게 던진 진짜 메시지가 그 무엇이든, 덕분에 조금 살 만해지는 기분이었다.
고양이는 늘 오늘이 처음인 것처럼 창가에 선다. 몇 번째인지는 집사나 세는 거다. 녀석들에겐 늘 첫 봄일지도 모른다. 따져 보면 나 역시 백수로 봄을 맞는 건 처음이다. 저마다의 처지 앞에서는, 누구라도 첫 봄일 수 있겠다. 봄도 이런 관객과 마주하는 게 늘 오늘이 처음일지도.
물론 감성 따위 넣어 두면, 집사를 둔 고양이는 물리적으로도 매일 봄일 수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인간들이 반팔이거나 패딩을 걸치거나, 고양이는 늘 봄 같은 방에서 아늑하다. 그저 날씨와 싸우는 인간들을 한심하다는 듯 관람하면 되는 거다. 쩌억, 길게 하품을 뽑으면서.
그럼 집사에게는 누가 봄을 선물해 주나.
나도 집사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내가 내 마음을 지켜주지 않으면 영원히 봄은 오지 않는다. 고양이를 살피듯, 내가 나의 집사가 돼 주어야 한다. 그리고 고양이처럼 창밖을 보며 감탄하는 거다. 마치 오늘이 첫 봄인 것처럼. 내 앞의 창을 여는 건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