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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철 Jun 15. 2024

학자의 탄생

인문학이나 철학의 경우 제대로 된 학자나 사상가가 탄생하려면 3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학문에서는 언어와 고전 학습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그것을 공부하려면 어렸을 적부터 노가다 일 하듯이 해야 한다. 천재적 사상가인 니체가 이런 노가다 학문인 문헌학으로 학자의 삶을 시작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막스 베버는 짐나지움 시대에 이미 칸트나 헤겔 같은 철학자들의 고전을 독파했다. 수업 시간에 다른 책들 사이에 끼어 넣고 몰래 책들을 읽었다는 것이다. 한국은 대학원에서도 그런 책들을 읽기가 쉽지 않다. 평생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한 게오르크 짐멜이 '돈의 철학' 같은 명저를 쓰고 사회학자로서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먹고 사는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도 될 유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칸트나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 같은 이들이 경제적으로 시달리면서도 일가를 이룬 현실을 감안한다면 위의 주장은 일반화되기는 힘들 수도 있지만, 이런 대가들의 경우는 예외적이다.



조선의 유학이 대단히 높은 수준에 올랐던 것도 사대부 집안의 자제들이 어렸을 적부터 사서삼경을 암송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평생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갔던 조선의 유학자 강항(姜沆)이 일본에 성리학을 전수할 수 있었던 것도 어렸을 적부터 암송했던 덕분이다. 그들이 그렇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세기 조선 말의 학자 혜강 최한기가 평생 엄청난 저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물려 받은 유산으로 당대 최고의 지식을 담은 서책들을 수시로 구할 수 있었던 사정을 배제할 수 없었다. 20세기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가난 등 시대의 영욕과 고난을 겪었던 한국인들에게 이런 환경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나 다름 없었다. 이제 그나마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하면서 삶의 환경이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아직은 그들에게 한국적 사상과 철학을 요구한다는 것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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