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고
정이현 소설가는 2002년 '문학과 사회' 신인상에 당선되며 문단에 데뷔했다. 등단 소식을 알리는 문예지 직원의 전화를 지하철에서 받고 그녀는 우선 당선작이 어떤 것인지 물어봤다. 제발 '낭만적 사랑과 사회'만은 아니길 바라며... 그녀가 그토록 데뷔작이 다른 작품이 되기를 원했던 것은 다음의 첫 문장 때문이었다.
나는 레이스가 달린 팬티는 입지 않는다(본문 중에서)
작가로서 세상을 향한 첫 출사표가 되는 문장이 너무 남사스러워서 사람들이 이 소설의 첫 문장만은 보지 않고 잊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상의 소설 '날개'의 첫 문장 '박제가 된 천재를 아시오'라는 문장과 함께 이 첫 문장은 정이현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회자되는 명문장이 되어 그녀의 문학적 출발점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며 오늘날에도 끝없이 회자되고 있다. 그만큼 그녀의 등단작은 임팩트가 있었다.
그녀의 등장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전과는 다른 여성상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도발적이라고 느껴진 건 더 이상 착하지 않은 욕심덩어리들의 실체, 이른바 된장녀라고도 불릴 수도 있는 서울 강남 차도녀들을 작품의 전면에 내세웠기에 가능했다. 90년대 IMF를 거치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그녀들은 자기의 야망을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은색 투스카니와 뉴비틀, 샤넬과 루이뷔통 백 그리고 그랜드 하이야트 호텔로 상징되는 서울의 중심부 상류층만이 누릴 수 있는 단어들이 세대를 대표하며 이전과는 다른 여성상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전까지 소설에서 여성들은 불륜을 저지르더라도 관습적인 도덕관념 때문에 괴로워했다. 가족과 생계를 위하여 타락하더라도 양심이라는 마지막 방패는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이현 소설 속 그녀들은 내추럴 본 쿨 걸들이다. 순결을 지키지만 목적은 자신의 교환가치의 최대화를 위한 것이다. 최고의 남자를 만나기 위한 조건으로서만 순결이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녀막으로 상징되는 교환가치로서 순결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유사 성행위에 대한 선택을 하면서도 도덕적 갈등을 하지 않는다.
피임을 하지 않아 임신을 하고 만 친구 혜미를 보며 주인공은 더욱더 자신의 입장을 공고하게 정당시 한다. 공인회계사 공부를 하며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 피임을 하지 않는 남자 친구를 가진 혜미를 경멸하지만 그런 것에 연연치 않고 뉴비틀을 몰 수 있는 친구 아니 친구 아버지의 경제력에 굴욕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 굴욕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최고의 결혼 상대를 찾던 그녀에게 민석이라는 먹잇감이 나타난다. 의대생 상우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고진감래 하며 지켜왔던 순결이라는 패를 던져 청담동 며느리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지만 처녀성의 흔적이 타월에 나타나지 않아 그녀의 노력은 모두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짝퉁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운 루이뷔통 백으로 망가진 자존심을 회복하려 하지만 진실은 그녀의 이름처럼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 것이다.
유리의 성이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큐빅처럼 흩뿌려진 서울의 불빛들이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바라다본다(본문 중에서)
2002년에 데뷔한 작가는 2004년 타인의 고독으로 이효석 문학상을, 2006년 삼풍백화점으로 현대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에 안착한다. 첫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가 드라마로 만들어지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하였다. 교보문고에서 제작한 낭만서점이라는 소설 전문 팟캐스트에서 진행 솜씨를 뽐내기도 했던 그녀는 전업작가로 돌아가 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 등 많은 명작들을 생산하는 대표적인 문단의 중견작가로 성장했다. 많은 공모전에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신선한 후배 작가를 발굴하는 일에도 힘을 쏟고 있다.
내추럴 본 쿨걸을 뽐내던 도발적 신인에서 중량감이 느껴지는 기성작가로 성장하는 20여 년의 세월 동안 부지런히 작품을 창작해왔던 그녀이기에 앞으로 남은 세월에도 그녀의 소설을 기다리는 팬들의 마음은 마냥 행복해 보인다. 소설 속 사랑은 유리 같지만 그녀의 소설은 강철같이 단단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