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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층과 지하 일층 사이에서 발견한 신세계

김중혁의 '1F/B1'을 읽고

by 하기

일층과 지하 일층 사이에서 발견한 신세계

김중혁의 '1F/B1'을 읽고


작가 김중혁에게 지하실은 특별한 공간이다. 소설집 '악기들의 도서관' 속 소설 '비닐광시대'의 지하실이 대표적이다. 그 이야기에서 지하실은 디제이인 주인공이 좋아하는 LP판이 무더기로 깔려있는 환상의 공간이지만 레코드판에 깔려 죽을 수도 있었던 감금의 지옥이기도 했다.


'1F/B1'에서 작가는 지하실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 고평시의 건물관리자연합 비밀사무실. 고평시 도시계획과 건물건설에 깊숙이 관여하고 명저 ‘지하에서 옥상까지-건물관리매뉴얼’을 집필한 구현성이 창조해 낸 그들만의 공간을 탐색해간다. 문학동네 제1회 젊은작가상 대상 수장작 이기도 한 이 단편소설에서 작가는 건물관리자연합이 결성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건물관리자연합이 생기게 된 이유는 입주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입주자들의 문의나 집단 항의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지구가 만들어진 이래 모든 단체가 그러했던 것처럼(1F/B1 본문 중에서)


김중혁 작가는 기발한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소설 세계를 만들어왔다. 서른 살이 되던 해 펭귄뉴스로 '문학과사회'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후 10년간 소설집 '펭귄뉴스', '악기들의 도서관' 장편소설 '좀비들', '미스터모노레일' 등을 발표하며 독특한 세계관으로 자신만의 매력을 어필한다. 엇박자D로 김유정문학상, 요요로 이효석문학상, 소설집 '가짜 팔로 하는 포옹'으로 동인문학상, 심훈문학대상 등을 받으며 문학적 성취를 문단으로부터 인정받는다.


문단의 인정 외에 김중혁 작가는 작가의 영역을 방송으로 확장하는 데도 능력을 보였다. '문장의소리' 진행과 PD를 통하여 팟캐스트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였다. 이후 이동진 평론가와 6년간 인기 독서 팟캐스트 '빨간책방'을 성공시켰다. 그 인연을 계기로 영화당, 대화의 희열 등 방송에도 패널로 참여하여 인기를 구가하였다. 최근에는 블러썸크리에이티브라는 작가들의 기획사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하는 등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튜브에서 김중혁TV라는 채널을 운영하고 있고 일러스트에도 재주가 많아 자신의 소설에 삽입된 그림은 직접 그릴 정도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


까고 또 까도 새로운 속살이 나오는 양파 같은 비밀을 가진 작가처럼 작가가 창조해낸 작품 속 주인공 구현성에게도 남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다.

구현성은 캄캄한 방 안에서 캄캄한 어둠을 바라보며 어둠 속으로 영원히 묻히는 비밀이란 과연 가능할 것인지 생각했다. 한 사람만의 비밀, 두 사람만의 비밀, 세 사람만의 비밀, 저 어둠 속에는 얼마나 많은 비밀이 묻혀 있을까. 죽어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비밀을 품은 채 숨을 거두는 것일까. 구현성은 자신의 비밀이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두려웠다.(1F/B1 본문 중에서)


소설가 이상은 비밀이 없는 사람은 재산이 없는 사람처럼 매력이 없다고 했다. 실질적으로 고평시의 건물관리자들을 지배하는 구현성은 어떤 매력으로 사람들을 포섭해갔을까? 그는 저서에서 건물관리자들의 고충을 묘사하는 문학적 재능으로 건물관리자들의 마음을 뺏는다.


고평시의 네오타운을 초현대식 복합상가로 재개발하려는 비횬개발의 계획에 구현성이 협조하면서 그와 건물관리자 사이에 비밀이 생긴다. 구현성은 그 계획에 협조하는 것이 쇠락의 징후를 보이고 있는 네오타운과 건물관리자 모두에게 이득이라고 판단한다. 자신의 심복이고 건물관리자 연합의 2인자인 이문조에게도 비밀에 부칠 정도로 비밀리에 진행된 계획은 홈세이프빌딩 관리자 윤정우와 오데옹빌딩의 관리자 조천웅이 비횬개발의 특공요원들과 싸우는 '암흑 속의 전투'과정에서 사람이 다치고 특공요원 일부가 생포되어 경찰에 인계되며 무위로 돌아간다.


애초 사람이 다치면 안 된다는 약속을 비횬개발이 어겼기에 구현성이 이 계획에 협조하지 않게 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양심의 가책을 갖게 된 구현성은 사라지고 이문조가 건물관리자연합의 회장이 되어 네오타운을 이끌지만 네오타운은 구현성의 예상대로 급속한 쇠락을 맞이한다. 어렴움에 직면한 네오타운에서 구현성에 이어 건물관리자들의 새로운 정신적 지주가 된 사람은 이문조가 아니라 부회장인 윤정우였다. 윤정우는 한 칼럼에서 건물관리자들을 SM이라고 호칭하며 그들의 정체성을 확립시킨다.

특히 숫자와 숫자 사이에 있는 슬래쉬 기호(/)를 볼 때마다 우리의 처지가 딱 저렇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층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끼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곳도 저곳도 아닌, 그저 사이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하1층과 1층 사이, 1층과 2층, 2층과 3층......층과 층 사이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슬래쉬가 없어진다면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을 겪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미미한 존재들이지만 꼭 필요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누군가 저의 직업을 물어본다면 저는 자랑스럽게 슬래쉬 매니저(Slash Manager)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얘기하시길 바랍니다.(1F/B1 본문 중에서)


작가는 소설집의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속된 이 도시가 좋다. 이 도시에서 살아갈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앞으로도 도시 속 사이의 공간들을 계속 탐색해갈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사이에서 살고 있다. 지상과 지하 사이, 부자와 빈민 사이, 이상과 현실 사이, 행복과 불행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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