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닻을 읽고
한강은 데보라 스미스가 영역한 소설 채식주의자로 세계 3대 문학상의 하나인 맨 부커상을 받으며 국민작가의 반열에 등극한 세계적인 소설가이다. 그녀의 문학적 성취는 국내에서 이상문학상, 동리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 받을 수 있는 대부분의 문학상을 석권하며 인정을 받은 상태였지만 맨 부커상 수상이 그녀의 작가적 업적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강의 아버지는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쓰고 '해변의 길손'으로 1988년에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한승원 소설가이다. 2005년에 몽고반점으로 이상문학상을 받은 한강 소설가는 국내 최초의 부녀 이상문학상 수상자로 유명하기도 하다. 아버지의 문학적 유산을 온몸으로 흡수한 한강 작가는 1993년 뜻밖에도 시로 먼저 등단을 한다. 문학과 사회에 '서울의 겨울'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한강 작가는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붉은 닻으로 당선되며 소설가로도 등단하였다.
서울의 겨울(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수록, 한강 著)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
네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 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얼음 흐른 내 뺨에 네가 좋아하던
강물 소리,
들려주겠네
붉은 닻의 서사구조는 단편소설인 만큼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다. 아버지의 죽음과 이로 인한 남겨진 가족들의 상실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이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한강 작가는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단순한 서사구조를 뛰어넘는 소설을 창작하는데 투입한다. 서해안 갯벌에 점점 잠기는 녹슨 붉은 닻의 모습과 가족들의 상황을 통하여 인간 존재의 근원성과 아버지의 죽음이 가져오는 상실의 심연을 특유의 시적 문체로 생생하게 우리에게 전달해준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아버지는 술을 통해 심리적 보상을 받으려고 하고 이를 바라보는 어머니는 체념 상태에서 매일 밤 남편이 무사히 귀환하기만을 바라며 홀로 문방구를 운영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현실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세상을 허깨비처럼 떠도는 아버지의 모습은 동식과 동영에게 불안과 회한의 감정을 심어준다. 그런 아버지가 시체도 찾지 못한 채 한 짝의 신발로 돌아와 남겨진 가족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만다.
어머니는 밤마다 문방구의 불을 밝히고 남편의 귀환을 고대하고 장남 동식은 현실의 괴로움을 일찍부터 배운 담배와 술, 사창가의 여자를 통하여 잊어버리려 하지만 그 결과는 간경변에 의한 죽음 직전의 건강악화였다. 건장한 체격을 가져 신체적으로는 문제를 보이지 않지만 차남인 동영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친구의 비아냥에 복수를 한 이후로 집에 정착하지 못하고 밤마다 어두운 거리를 방황하며 아버지처럼 죽지 않을까 가족들이 걱정하게 만든다.
이러한 가족의 상태는 동영의 입대로 잠시 휴지기를 가진다. 밤마다 돌아오지 않는 동영의 귀환을 기다리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바라봐야만 하는 동식의 심리는 복잡하기만 하다. 술과 담배를 끊고 건강을 회복한 후 직장을 잡은 동식은 자신의 성실한 사회생활이 불안과 우울로 잠식되어가는 가족들을 구원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 속에 어머니와 가족의 상처가 저절로 아물기를 바라면서...
동식은 순간순간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누구의 부축 없이도 걷고 싶었으며 월급봉투를 받아 귀가하고 싶었다. 출퇴근 만원버스에 시달리고 싶었다. 상사들의 호통을 듣고 저녁이면 술자리에 앉아 그들을 헐뜯고 싶었다. 여자와 함께 살고 싶었고 자식을 낳고 싶었다. 제때 예방주사를 맞힌 자식들이 자라 조막손으로 만든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두발을 땅 깊이 묻기를 원했다. 그 곳에 물을 주어 잎을 틔우기를 원했다. 그 울창해진 그늘에 백발의 어머니가 편안히 눕기를 원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아파트 청약금을 붓고 있었다. 그는 떠나기를 원했다. 다시는 아버지가 실체로든 혼령으로든 나타날 수 없도록, 영원히 그 동네를 등지기를 원했다. 동영이 돌아오기 전까지 동식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아버지의 어둠이 까마득한 곳으로 흘러가버렸음을, 동식의 가계에서 말소되어버렸음을 믿고 있었다.(붉은 닻 본문 중에서)
하지만 동영의 제대와 가출로 다시 가족의 상황은 동영의 입대 전으로 회귀하는 듯하다. 이런 동영을 향하여 동식은 주먹을 날리지만 동영은 첫번째 주먹은 말없이 맞다가 두번째 주먹을 단단한 팔로 막는다. 다음날 동영은 문방구에 겨울 난로를 설치하며 어머니를 돕는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처럼 주말여행을 계획한다. 오랜만에 버스를 타고 서해안을 찾은 3 모자. 그곳에서 그들은 갯벌을 가득 채운 녹슨 붉은 닻들과 마주친다.
닻들은 효용을 다하고 바다에 방치되어 있다. 그리고 녹이 슬고 변색된 상태에서 점점 갯벌로 빠져들어간다. 어머니의 몸이 백발과 저승꽃으로 서서히 생명을 다하여 가듯이. 갯벌에서 조개를 캐며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다가 동식은 또 동영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동영을 찾아 나선다. 서서히 갯벌로 침잠해 들어가는 붉은 닻처럼 바닷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동영. 이윽고 뒤 돌아 나오는 그의 모습은 사람이 아닌 귀신처럼 느껴진다. 어머니는 그 모습에서 귀가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만다.
동식은 어머니의 목마른 시선이 닿은 곳으로 성급히 몸을 돌렸다. 불타는 닻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한 사내의 검붉은 그림자가 그 속에서 너울너울 춤추며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붉은 닻 본문 중에서)
한강 작가의 붉은 닻은 그녀의 등단작인 만큼 완성도와 구성에 있어서 지금처럼 세련되지 않다. 하지만 문제의식의 묵직함에 있어서 대작가의 출발은 남달라 보인다. 그녀가 이후 작품에서 끊임없이 추구하였던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과 폭력성, 가족의 부재와 상실을 대하는 남겨진 자들의 고통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어쩌면 한강 문학의 화두가 등단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후 작품들에서 이 화두가 계속 변주되어 우리에게 연주된 것 같은 느낌이다.
최근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설을 통하여 5년 만에 복귀한 한강 작가. 그녀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되는 건 '붉은 닻'부터 '작별하지 않는다'까지 그녀가 끝까지 놓지 않고 탐구하는 인간이라는 주제가 모든 작가들이 풀어야 할 영원한 숙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