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그림자
세무서 조사과 김철민 팀장에게 '자료상(자료를 거래하는 상인)'은 단순한 탈세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성실 납세 질서를 좀먹는 '경제 암세포'였다.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령 회사들을 만들어 가짜 세금계산서를 뿌리고, 기업들은 이를 통해 불법으로 매입세액 공제를 받아 국고를 축냈다. 자료상 본인들은 거액의 부가가치세를 챙긴 뒤, 신고 무납부 혹은 무신고로 잠적하는 수법을 썼다.
김 팀장의 책상 위에는 최근 'A자재'와 'B유통' 등 여러 유령 법인을 이용해 500억 원 상당의 가짜 세금계산서를 유통한 혐의를 받는 거물급 자료상, '곽만식'에 대한 조세범칙조사 착수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곽만식은 이미 몇 차례 세무 조사를 받았지만, 그때마다 법의 허점을 이용해 집행유예나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나 다시 활동을 재개하는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김 팀장은 팀원들에게 비장하게 말했다.
사라진 용의자
조사 착수와 동시에 곽만식의 사업장과 주거지를 급습했지만, 그는 온데간데없었다. 마치 연기처럼 사라진 유령 같았다. 흔적만 남은 사무실에는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장부는 이미 파기된 상태였다.
"또 도망갔군." 김 팀장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조사는 멈출 수 없었다. 팀원들은 곽만식과 거래한 수백 개의 거래처를 대상으로 끈질긴 '간접 조사'에 착수했다. 곽만식이 발행한 세금계산서가 모두 허위였다는 결정적인 증거, 즉 실물 거래가 없었다는 진술과 자백을 하나씩 확보해 나갔다. 꼬박 두 달, 불철주야 밤샘 조사를 통해 김 팀장팀은 곽만식이 주도한 대규모 '자료상 행위'의 전모를 완벽하게 재구성해냈다.
김 팀장은 혐의를 입증할 충분한 증거를 확보했고, 곽만식에 대해 '조세범 처벌법'에 의거하여 검찰에 고발 조치했다. 유령을 잡은 듯한 성취감과, 세금계산을 어지럽히는 자를 단죄했다는 정의감이 온몸을 감쌌다.
날아온 역풍
세무 조사 고발 후 몇 달이 흘렀다. 김 팀장은 잠잠해진 일상 속에서 잠시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다.
사라졌던 곽만식이 돌연 검찰에 출두한 것이다. 그리고 곽만식은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조사를 전혀 하지 않은 채, 거래처 진술만으로 고발하여 인권을 침해하고 직권을 남용했다는 명목으로 김철민 팀장을 검찰에 '역고발'했다.
"나를 조사도 않고 고발하다니, 세무 공무원의 직권 남용이다!"
뉴스 기사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유명 자료상, 세무 공무원 직권 남용 고발!' '국세청 무리한 고발 논란!' 김 팀장은 순식간에 언론의 표적이 되었고, 성실히 일한 대가로 돌아온 것은 '직권남용'이라는 오명이었다.
악전고투의 나날
김 팀장의 삶은 지옥으로 변했다.
검찰의 소환 조사가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검찰청으로 출근하는 기분이었다. 검사 앞에서는 자신이 직권을 남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유령처럼 사라진 범죄자를 잡기 위해 '간접 조사'라는 불가피한 수단을 썼음을, 그것이 오히려 더 치밀하고 철저한 조사였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했다.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는 세무 공무원이라니, 말이나 됩니까!" 조사받는 과정에서 그는 모욕적인 언사를 견뎌야 했고,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스트레스는 극에 달해, 겉으로 멀쩡하던 몸에 병이 찾아왔다. 위경련과 불면증은 일상이 되었고, 얼굴은 파리하게 수척해졌다.
그의 팀원들까지 참고인 조사를 받으며 고통을 분담했다. 곽만식은 교활하게 법의 논리를 악용하여, 자신을 잡으려는 수사 기관을 역으로 옥죄고 있었다. 김 팀장은 이것이 바로 자료상이 국세청을 괴롭히는 가장 비열한 전술임을 깨달았다. 조사관을 무력화시켜 다음 조사를 막는 것이다.
진실의 승리
김 팀장은 굴하지 않았다. 그는 곽만식의 자료상 행위를 입증했던 수백 건의 간접 조사 기록, 세금계산서의 유통 경로, 그리고 곽만식의 잠적 시점과 의도까지, 모든 증거를 재정리하여 검찰에 제출했다.
결국, 검찰은 끈질긴 보강 조사 끝에 곽만식의 역고발이 '조사 무력화를 위한 허위 고발'임을 확인하고, 김 팀장에게 혐의 없음(불기소 처분) 결정을 내렸다. 동시에 곽만식의 자료상 혐의에 대해서는 조세범 처벌법을 적용하여 정식 재판에 회부했다.
검찰청 문을 나서는 김 팀장의 얼굴에는 수개월간의 고난이 새겨져 있었다. 정의는 승리했지만, 그 승리의 대가는 너무나 컸다.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 그리고 세무 공무원으로서의 명예에 흠집이 났던 고통스러운 시간들.
"자료상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김 팀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곽만식 같은 자료상이 또다시 법의 틈을 비집고 나올 것이고, 그들을 근절하기 위한 자신의 악전고투는 계속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료상의 교활함과 법의 한계를 동시에 마주하며,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다시 세무서로 향했다. 그가 짊어져야 할 '자료상과의 전쟁'은 아직 현재진행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