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 속의 폭로
2024년, 늦가을의 스산한 바람이 서울 종로의 세무서 건물을 휘감던 날이었다. 세무서 법인조사과 5년 차 김 주무관은 여느 때처럼 수북이 쌓인 서류 더미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날, 그의 책상 위에는 여느 제보서와는 확연히 다른, 두툼하고 묵직한 서류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봉투를 열자, 정교하게 작성된 '탈세 제보서'와 함께 수많은 증거 자료들이 쏟아져 나왔다. 제보의 요지는 간단했다. '강남에서 수입 명품 가구를 판매하는 A법인의 사장 박 모 씨가 이중장부를 만들어 수년간 매출을 누락하고, 법인세와 개인 소득세를 포탈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다'는 것이었다.
첨부된 자료들은 치밀했다. 실제 매출이 기록된 비밀 장부의 사진, 차명 계좌의 입출금 내역, 심지어 사장의 호화로운 개인 소비 내역까지. 제보자의 진술은 구체적이고 증거는 명확하여, 조사 착수를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김 조사관은 직감했다. "이건 대형 건이다."
현장의 뜻밖의 만남
다음 날 아침, 김 조사관은 조사팀을 이끌고 강남의 A법인 사업장으로 향했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박 사장에게 세무조사 통지서를 전달하고, 상황을 설명한 뒤 관련 자료 제시를 요구했다.
"죄송합니다만, 이게 무슨 일인지요? 저희는 법대로 세금 다 내고 있습니다!" 박 사장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박 사장 뒤편에서 한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넉살 좋은 미소를 띠고 깔끔한 정장 차림을 한 남자였다.
"제가 이 분 동업자입니다. 무슨 일인지 저에게도 설명해 주시죠."
박 사장은 그 남자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아, 맞다. 이 분이 회사 일은 저보다 더 잘 아시니, 같이 얘기하시죠."
김 주무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순간, 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낯익은 얼굴. 며칠 전, 그가 책상에서 접수했던 그 탈세 제보서의 작성자, 바로 그 제보자였다! 그는 제보를 할 때와는 달리, 마치 회사의 핵심 관계자인 양 자연스러운 태도로 사장 옆에 서 있었다.
처남과 매형의 밀실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김 조사관은 표정 변화 없이 조사를 진행했다. 제보자가 동석한 채로 박 사장에게 누락된 매출 장부의 존재와 차명 계좌에 대해 묻는 상황 자체가 초현실적이었다. 박 사장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고, 제보자는 박 사장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때로는 미묘한 침묵으로 상황을 관망했다.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두 사람의 대화에서 슬쩍 단서가 포착되었다.
"매형,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동업자라고 주장하던 제보자가 박 사장에게 '매형'이라고 부른 것이다.
김 조사관은 그제야 제보자와 피제보자의 관계를 깨달았다. 처남과 매형! A법인 사장인 박 사장이 매형이고, 그를 탈세로 고발한 동업자이자 제보자가 바로 박 사장의 처남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하게 꼬여 있는지 짐작이 갔다. 단순한 동업자 간의 불화가 아니라, 처남이 매형의 탈세를 폭로하고, 심지어 그 폭로의 현장에 동석하여 마치 조력자인 척 행세하는 기묘한 상황.
조사 내내, 김 조사관은 제보자인 처남과 피제보자인 매형을 동시에 바라보며 질문하고 자료를 검토해야 했다. 처남은 때로는 씁쓸한 표정으로 매형의 변명을 들었고, 매형은 처남의 존재가 불편한 듯 연신 땀을 닦았다. 밀실에서 벌어지는 이 기묘한 가족 싸움은 김 조사관에게 난처함을 넘어선, 인간 군상의 이면을 목격하는 듯한 불편함을 안겨주었다.
에필로그 : 진실의 대가
제보자의 정확하고 치밀한 증거 덕분에, 세무조사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중장부와 차명 계좌의 존재가 명확히 드러났고, 법인세와 개인 소득세 수십억 원이 추징되었다. 박 사장은 결국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
사건이 종결된 후, 김 조사관은 제보서와 조사 기록을 다시 살펴보았다. 탈세로 축적된 막대한 부에 대한 질투, 혹은 동업자로서의 배신감, 그리고 가족 간의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끝에 터져 나온 폭로였으리라. 한 사람은 법의 심판대 위에 서게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거액의 포상금을 받게 되겠지만, 그들 가족 관계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았을 터였다.
'제보자의 두 얼굴'—사업의 파트너, 그리고 복수의 처남. 김 조사관은 그날의 씁쓸한 현장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다. 정의는 실현되었지만, 그 정의의 뒤편에는 인간의 탐욕과 배신, 그리고 가족의 비극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봉투 속에서 폭로자가, 그리고 현장에서는 동업자가 되어 매형을 지켜보던 그 남자의 싸늘한 미소를 떠올렸다. 진실을 밝히는 세무서의 임무가 때로는 가장 인간적인 비극의 목격자가 되는 순간임을 깨달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