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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의(입주자대표회의) 전쟁

명의 변경의 나비효과

by 하기

입대의(입주자대표회의) 전쟁 : 명의 변경의 나비효과


조용한 민원실에 터진 핵폭탄


내가 근무하던 세무서의 사업자등록 담당 창구는 평소 늘 조용했다. 주로 새로운 가게를 시작하는 설렘 가득한 사업가나, 단순한 서류 정정 민원인이 오가는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온했던 민원실에 폭풍이 몰아쳤다.


"이게 말이 됩니까! 세무서가 도대체 뭘 하는 곳이야!"

"우리 아파트는 지금 엉망이 됐는데, 세무서가 공범이야, 공범!"


입주자대표회의(이하 '입대의') 전 대표와 그 지지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스무 명 가까이 몰려와 민원실을 점거했다. 그들은 손에 '세무서, 입대위 전쟁에 개입했나!', '불법 명의 변경 책임져라!' 같은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우리 세무서가 아파트 'A 입주자대표회의'의 사업자등록증상 대표자를 구 대표(김 씨)에서 신 대표(박 씨)로 변경해 준 것이었다. 신 대표 측이 제출한 입대의 회의록, 선출 공고문 등의 서류를 보고 절차상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여 명의를 변경해 준 것이었다.


하지만 구 대표 측 주장은 달랐다. "새 대표가 자기랑 친한 입주민 몇 명만 모아서 가짜 회의록을 만들었고, 세무서가 그걸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명의를 바꿔줬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사업자등록증의 대표자 명의 변경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아파트 권력을 통째로 빼앗긴 결정적인 패배였다.


담당자의 고난과 집단 시위


나는 이 명의 변경을 처리했던 바로 그 담당자였다.


"당신이 바꿔줬지! 서류 대충 보고 도장 찍은 거 아니야? 입주민들 삶이 달린 문제를 이렇게 쉽게 처리해?"


구 대표 측 지지자들은 나에게 책임을 집중했다. 내가 마치 아파트 선거에 개입한 악덕 관료라도 되는 양 삿대질을 해댔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해명했다.


"저희는 제출하신 서류가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었는지를 확인했을 뿐입니다. 회의록의 진위 여부나 선출 과정의 실질적인 분쟁은 법원에서 판단해야 할 사안입니다. 저희가 위조 여부를 판단할 권한은 없습니다!"


하지만 분노한 민원인들에게 나의 해명은 변명일 뿐이었다. 그들은 세무서장실 앞 복도까지 진출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관리자들은 진땀을 흘리며 사과했고, 나는 내 업무를 수행한 것뿐인데 졸지에 '불공정 행정'의 주범이 되어 수없이 불려 다니며 경위서를 써야 했다.


나는 생각했다. '아니, 아파트 대표가 바뀌면 당연히 사업자등록증도 바꿔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분들은 왜 법적 분쟁을 세무서에 와서 푸는 거지?'


하지만 민원인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 기관인 세무서의 도장이 찍힌 '사업자등록증'이야말로 신임 대표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것이다.


원상복구와 씁쓸한 교훈


결국 이 사태는 세무서와 입주자대표회의 양측 모두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었다. 서장이 직접 나서 중재하고, 법률 자문을 구하는 등 한바탕 난리가 났다.


며칠간의 소동 끝에, 구 대표와 신 대표는 세무서의 '조정 권유'와 향후 법적 분쟁의 위험 부담 때문에 결국 한발 물러섰다.


두 사람은 나란히 민원실에 다시 찾아왔다. 겉으로는 화해한 듯 보였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었다.


"담당자님, 저희가 합의했습니다. 일단 사업자등록증상 대표자를 다시 구 대표 명의(김 씨)로 되돌려 주세요. 그리고 저희 아파트가 법원에서 정식으로 선거 절차를 다시 밟아서, 새로운 대표가 취임하면 그때 다시 적법한 서류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나는 허탈했다. 온갖 시달림을 겪은 끝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두 사람이 제출한 '합의서'를 받고, 대표자 명의를 다시 구 대표인 김 씨로 변경해 주었다. 명의 변경이 번복되는 순간이었다.


민원실 문을 나서는 두 대표와 지지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절차적 정당성 : 형식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제출된 서류만 보고 기계적으로 절차를 따랐다. 하지만 공무원의 도장 하나가 찍히는 순간, 그 행위는 단순한 서류 정정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권력 구도와 수백 가구의 이해관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서류가 완벽해 보이더라도, 뒤에 숨겨진 '실질적인 분쟁'의 가능성을 읽어내고, 민원인에게 추가적인 확인 절차나 법적 분쟁의 가능성을 충분히 고지했어야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사업자등록증 관련 민원이 들어오면 민원인에게 '혹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분쟁이 있지는 않으신지', '제출하신 서류에 법적 문제가 발생할 소지는 없는지'를 집요하게 묻는 버릇이 생겼다.


단순히 서류를 접수하고 처리하는 '기계'가 아니라, 공공 행정의 신중한 심사자로서의 역할을 절실히 깨달은, 아파트 입대의 전쟁의 씁쓸한 교훈이었다. 민원 업무에 있어서 '신중함'은 친절함만큼이나 중요한 덕목임을, 나는 온몸으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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