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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넘어 그랜저를 타고 떠난 노인

by 하기

창문넘어 그랜저를 타고 떠난 노인


초년병의 편견


사회생활 초년병에게 세상은 아직 단순했다. 수많은 납세자를 상대하는 세무 공무원인 나에게도 무의식중에 '편견'이라는 잣대가 존재했다. 사람이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고 배웠지만, 숨 가쁜 부가가치세 신고 기간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비싼 모피코트를 걸치고 세련된 비서를 대동한 채 상담을 받는 사모님을 보면, 왠지 모르게 태도가 공손해지고 ‘세무적으로 복잡한 분’일 거라는 선입견이 생겼다. 반면, 꾀죄죄한 점퍼에 낡은 작업복 차림으로 나타난 사업자를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면서도 '간단한 신고를 할 영세 사업자'일 거라 지레짐작했다. 솔직히 말해, 복잡하고 까다로운 질문을 할까 봐 그들을 조금은 피하고 싶었다.


그날도 그랬다. 창구로 다가오는 한 노인을 보자마자 내 속으로는 한숨을 쉬었다. 검은색 때가 낀 누런 점퍼에, 낡은 털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모습. 가까이 다가오자 희미하게 땀 냄새와 먼지 냄새가 섞인 냄새가 났다.

‘아, 제발 복잡한 거 아니기를.’


하지만 머피의 법칙은 늘 그렇듯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그 노인은 정확히 내 창구 앞에 섰다.


꾀죄죄한 노인의 절절한 하소연


"젊은 양반, 나 좀 살려주게. 나같이 나이 먹고 배운 것 없는 사람은 이 세금이라는 게 너무 어려워서 말이야."

노인은 주섬주섬 꼬깃꼬깃한 영수증과 서류 뭉치를 꺼내 놓았다. 손등은 두꺼운 마디로 울퉁불퉁했고, 쭈글쭈글한 얼굴에는 고단한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다. 그의 사업은 오래된 철물점이나 공구상 같은 영세 제조업 쪽인 듯했다.


"자네가 세무사라고 생각하고, 나 좀 도와주게나. 이거 잘못 내면 큰일 나."


평소 같으면 납세자 스스로 작성하게 하고 나는 검토만 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절절한 하소연과 그 불쌍해 보이는 외모 때문에, 나는 그의 서류를 받아들고 마치 세무 대리인처럼 거의 모든 신고 과정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매출, 매입, 공제 항목을 하나하나 꼼꼼히 챙겨서 계산기를 두드렸다.


'좀 불쌍한 분이니까, 세금 조금이라도 줄여드려야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유리한 방식으로 세액을 산출했다. 한참 만에 신고서가 완성되자, 예상보다 적게 나온 세금에 노인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영감님 덕분에 살았네! 젊은 나이에 어찌 이리 세법에 밝으신가! 정말 고맙네, 고마워!"


나보다 서른 살은 족히 많을 노인이 나이 어린 나에게 연신 허리를 굽혀 '영감님'이라 칭하며 고마워했다. 나는 불쌍한 사람을 도와줬다는 선량함과, 나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우쭐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별말씀을요, 사장님. 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나는 겸손한 척하며 그에게 봉투에 담긴 신고 서류를 건넸다.


주차장에서 목격한 반전


노인은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창구를 벗어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뿌듯함과 함께 왠지 모를 기특함에 잠시 젖어들었다.


긴장된 신고 기간 중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나는 사무실 밖 휴게실로 나와 담배 한 모금을 피우려 했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왔다. 무심히 창밖, 세무서 주차장을 내려다보는 순간,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

방금 전까지 내 창구에서 허리가 굽도록 감사 인사를 하던 그 노인이었다.


그는 주차장 한쪽에 조용히 서 있는 검은색 대형 세단, 그랜저(Grandeur) 앞으로 걸어갔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 장면이었다.


운전 기사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재빨리 차에서 내려 깎듯이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뒷좌석 문을 열었다. 노인은 낡은 점퍼 소매로 입가를 훔치더니, 별다른 표정 없이 익숙하게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기사는 문을 닫고 노인을 태운 그랜저는 묵직한 소리를 내며 세무서를 빠져나갔다. 그때만 해도 그랜저는 대한민국에서 최고 부자만 타는 차였다. 지금으로치면 포르쉐나 람보르기니 급이었기에 나같은 서민에게는 꿈만 같은 자동차였다.


편견이 부른 민망함


나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릴 뻔했다.


'방금... 내가 신고를 대신 해준 그 꾀죄죄한 노인이, 운전기사를 둔 그랜저 오너라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내가 불쌍하고 영세한 사업자라고 지레짐작하고 동정심에 사로잡혀 '친절'을 베풀었던 그 사람은, 사실 나보다 훨씬 부유하고 여유로운 사람이었다.


나는 나의 외모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얄팍하고 오만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그의 낡은 옷차림은 사업의 규모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어쩌면 그는 수십 년간 땀 흘려 이룬 부를 과시하지 않는 소탈함의 상징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절세를 위해 자신을 최대한 '불쌍한 영세 사업자'처럼 보이게 하는 노련한 전술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나는 그의 겉모습만 보고 지레짐작하여 판단했고, 그 '불쌍한 사람을 도왔다'는 자기만족에 빠져 우쭐해지기까지 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민망했다.


그랜저를 타고 사라지는 노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다짐했다.


"사람은 외면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세법을 적용함에 있어 모든 납세자는 똑같이 공정해야 하며, 나의 친절함은 옷차림이나 겉모습이 아닌, 오직 세법의 정확한 적용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나는 그날의 씁쓸한 반전을 통해 뼛속 깊이 깨닫게 되었다. 30년간의 공직 생활 동안, 그때의 그랜저와 꾀죄죄한 노인의 모습은 내 마음속의 경계로 늘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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