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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함과 공정함

세무공무원의 이중 고민

by 하기


친절함과 공정함 : 세무공무원의 이중 고민


초보 세무 공무원의 신고상담창구 일기


갓 20대 중반을 넘긴 나는, 9급 공채 합격의 기쁨을 뒤로하고 곧바로 부가가치세과에 발령받았다. 삭막한 세무서 건물, 그중에서도 가장 숨 가쁘게 돌아가는 ‘부가가치세 신고 기간’ 한복판이었다. 세법 교육은 고작 며칠. 머릿속에는 온통 "매출세액에서 매입세액을 빼고...", "영세율, 면세..." 같은 복잡한 공식과 용어들뿐인데, 눈앞에는 수많은 사업자가 서류 뭉치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이게 바로 실전이구나."


투박한 철제 책상에 앉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첫 신고서를 접수하던 날을 잊을 수 없다. 몰려드는 사업자들은 나에게는 모두 똑같이 '납세자'였지만, 그들에게 세금 신고는 생계와 직결된 절박한 문제였다. 나는 서툰 솜씨로나마 최대한 친절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세법을 적용해주려 애썼다.


12만 원 때문에 벌어진 난투극


그날도 역시 정신없이 신고를 받고 있었다. 그때, 두 명의 남자가 나란히 상담 창구로 다가왔다. 둘은 같은 동네에서 장사를 하는 사이인지, 서로 어깨를 툭툭 치며 친근하게 들어왔다. 둘 다 영세 사업자에게 적용되는 '과세특례자'였다.


나는 서류를 받아 들고, 그들의 매출액을 컴퓨터에 입력하기 시작했다. 화면에 두 사람의 세액이 차례로 계산되었다.


먼저, 인상 좋은 아저씨의 차례.


"사장님, 축하드립니다! 사장님은 이번 과세 기간에 매출액이 부가가치세 면제 기준에 해당되셔서, 납부할 세금이 없습니다!"


아저씨는 주름진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다.


"아이구, 살았다! 고마워요, 젊은 양반. 덕분에 한숨 돌리네!"


다음은 그 옆의, 조금은 날카로워 보이는 사장님 차례였다. 나는 그분의 서류를 검토하고 다시 계산기를 두드렸다. 그분의 과세표준은 면제 기준을 아주 조금 상회하고 있었다.


"사장님, 사장님께는 죄송하지만, 매출이 면제 기준을 아슬아슬하게 넘기셨습니다. 세법에 따라 계산한 결과, 이번에 납부하셔야 할 부가가치세는 12만 8천 원입니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방금 전까지 하하호호 웃던 두 사람 사이에는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뭐라고? 나는 내고, 얘는 안 낸다고?" 날카로운 인상의 사장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이, 김 사장! 왜 나한테 화풀이야? 법이 그렇다는데!" 면제받은 아저씨도 당황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법이고 나발이고, 내가 너보다 장사가 얼마나 더 잘 됐다고! 고작 몇만 원 더 팔았을 뿐인데, 나는 12만 원을 토해내고 너는 땡이야? 세금 신고하는 날까지 재수 없게!"


그들의 분노는 신고 상담을 진행한 나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아니, 젊은 양반! 똑같은 장사치인데 왜 나한테만 이렇게 가혹하게 구는 거야? 제대로 계산한 거 맞아? 일부러 나한테만 많이 떼려는 거 아니야?!"


영문도 모른 채, 나는 마치 내가 12만 원을 횡령한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따가운 원망을 들어야 했다. 억울함과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복잡한 세법 조항을 설명해 주려 해도, 이미 격앙된 그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신고 창구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고참의 한 마디, 세법의 두 얼굴


그때였다. 뒤쪽에서 신고를 받던 고참 선배가 상황을 눈치채고 빠르게 다가왔다. 선배는 침착하게 두 사람의 신고서를 비교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님들, 진정하세요. 두 분 다 똑같은 세법을 적용받았습니다. 이 사장님은 기준점에 걸려서 면제 혜택을 받으신 거고, 김 사장님은 그 기준을 단돈 만 원이라도 넘기셨기 때문에 세금을 내셔야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법'입니다. 친절하게 계산해준 이 신입 직원을 원망하시면 안 됩니다. 법은 융통성이 없지만, 그 융통성이 없는 공정함을 지키는 것이 우리 일입니다."


고참의 단호하지만 절제된 수습 덕분에 두 사업자는 머쓱한 표정으로 12만 원의 세금 영수증을 받아 들고 돌아섰다.


나는 텅 빈 창구를 바라보며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고작 12만 원이라는 돈과, 면제 기준선이라는 보이지 않는 경계 하나가 두 이웃의 희비를 극명하게 갈랐다.


그날 밤, 나는 잠자리에 들면서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세금 공무원으로서 나는 친절해야 한다. 하지만 그 친절함이 개개인의 사정을 봐주는 '융통성'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세법이라는 냉정한 잣대를 공정하게 들이대야 하는 사람이다.


'친절함'은 개인에 대한 따뜻한 배려이지만, '공정함'은 수많은 개인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차가운 이성이다. 이 두 가지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세무 공무원의 숙명이자, 이 30년 공직 생활 내내 나를 괴롭힐 세무공무원의 이중 고민이라는 것을, 나는 신고대에서 겪은 12만 원짜리 난투극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이후로 나는 매일, 내 손으로 작성하는 신고서 한 장 한 장이 누군가의 기쁨이자 슬픔이며, 그 모든 과정을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이 세무 공무원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신념임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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