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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과 불친절 공무원의 경계

by 하기

친절과 불친절 공무원의 경계


신분증 없는 민원인


세무서 민원봉사실, 그곳은 하루에도 수백 명의 희로애락이 스쳐 지나가는 격전지였다. 나는 사업자등록 신청부터 각종 증명서 발급까지, 국민의 세무 행정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었다. 내 책상 앞에는 '신분증 지참'이라는 팻말이 늘 붙어 있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지키는 민원인은 많지 않았다.


그날 오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다. 중년의 덩치 큰 아저씨가 급하다는 듯 창구 앞에 섰다.


"젊은이, 소득금액증명원 좀 빨리 떼 줘. 은행에 제출해야 해서."


"네, 고객님. 신분증 먼저 제시해 주시겠어요?" 나는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세무 공무원의 기본이었다.


그러자 아저씨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아이고, 신분증을 깜빡했네. 그냥 발급해 주면 안 돼? 내가 나한테 증명원을 떼는데, 왜 신분증이 필요해?"


나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설명했다.


"고객님, 죄송합니다. 본인 확인 절차는 필수입니다. 특히 소득금액증명원은 중요한 금융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에 신분증 없이는 절대 발급해 드릴 수 없습니다. 세무서 내부 규정이고, 고객님의 정보를 보호하기 위한 절차이기도 합니다."


폭발하는 분노와 서장실


나의 공적인 설명은 아저씨의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그는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내가 내 명의로 된 서류를 떼겠다는데, 공무원이란 사람이 이렇게 융통성이 없어? 내 얼굴이 내 신분증이야! 이따위로 일할 거야? 당장 발급해 줘!"


나는 흔들리지 않으려 애썼다. 원칙을 지키는 것이 곧 공정함이라고 배웠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신분증 없이는 안 됩니다. 집에 가서 신분증을 가져오시거나, 가족에게 팩스로 사본을 받아볼 수는 있습니다."


"뭐? 집에 가라고? 내가 지금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너 지금 나 귀찮다고 무시하는 거야? 어디 소속이야, 너!"


급기야 그는 분노에 차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좋아. 절차대로 안 해주겠다 이거지? 내가 지금 당장 서장실로 올라가서 너를 '불친절 공무원'으로 신고할 거야! 이따위로 행정 서비스할 거냐고 따질 거라고!"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내게 절차상 잘못이 없다는 생각에 오기가 발동했다.


"네, 고객님. 그러셔도 좋습니다. 서장님께도 신분증 없이는 증명서를 발급할 수 없는 것이 원칙임을 설명드리겠습니다."


내 말이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그는 "두고 보자!" 소리를 지르며 정말로 서장실이 있는 위층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민원실은 순식간에 싸늘한 정적에 휩싸였다.


원칙과 유연성 사이에서


결국, 서장실 비서실에서 전화가 내려왔다. 상황을 전달받은 선임 직원이 개입했고, 팩스와 전화 통화를 통해 신분증 사본을 받고 간신히 증명서를 발급해 주었다. 그는 다시 민원실로 내려와 증명서를 받아 들고는, 불만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서둘러 세무서를 나섰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결국 원칙이 통했지. 내가 옳았어.'


하지만 며칠 후, 사건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국민신문고 민원 : 신분증 미지참 민원인에게 융통성을 발휘하지 않고 고압적인 태도를 취한 불친절 공무원'


아저씨는 정말로 나를 신고했고, 나는 감찰 부서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감찰 담당자는 차분하게 말했다.


"OO 씨, 절차적으로는 당신의 행동에 잘못이 없습니다. 신분증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원칙이죠. 하지만 문제는 '태도'입니다. 민원인은 급박하고 당황했을 때 공무원에게서 공감과 도움을 기대합니다. 당신은 원칙을 강조하느라 그가 느꼈을 불편함과 절박함을 외면했고, '서장실에 가셔도 좋다'는 식의 대응은 충분히 고압적이고 융통성 없는 태도로 비칠 수 있습니다."


결국 나는 절차적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태도 불량'으로 경고 처분을 받았다.


뼈아픈 교훈 : 공직의 그림자


충격이었다. 나는 법과 원칙을 지켰는데, 불친절 공무원이 되어 불이익을 받았다.


나는 그제야 '친절'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친절은 단순히 미소 짓는 것을 넘어, 원칙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의 감정과 상황을 얼마나 배려했느냐의 문제였다. 원칙을 지키는 공정함 뒤에는, 그 원칙을 설명하고 적용하는 데 필요한 따뜻한 유연성이 반드시 따라야 했다.


그날의 나는 원칙이라는 칼을 들고 민원인을 대했지만, 그 칼집에 따뜻한 배려의 헝겊을 두르는 것을 잊고 있었다. 세무 공무원은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국민에게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친절과 불친절 공무원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였다. 그리고 그 종이 한 장은 '원칙'이 아닌, 바로 '태도'라는 것을 나는 경고장과 함께 마음속 깊이 새겼다. 그 뼈아픈 교훈은 이후 30년 동안, 내가 민원인을 대하는 방식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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