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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레드릭 Sep 24. 2021

라흐마니노프

등굣길 차에서 아들이 트는 음악은 그날의 기분과 컨디션을 말해준다.

고등학교 입학 후 ‘드뷔시 달빛’을 시작으로 맑은 피아노곡이 주를 이루었는데

어느 날, 차 안으로 퍼지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듣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마치 절망의 심연으로부터 서서히 떠오르는 것처럼 시작되는 첫 악장, 무겁고 두꺼운 어둠의 장막을 헤치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을 연상시키는 음악에서 아들이 견디고 있는 절망 속 고독한 싸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자기감정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아들의 조용한 성격과 어우러져 절망의 고통이 몇 배 더 아프게 다가왔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이 곡은 절망과 희망이 애절하게 교차하다가 마지막 악장에서 마침내 승리를 쟁취해내는 행진곡으로 역경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나서 환희를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곡이 마무리되는데 이것은 라흐마니노프가 초기에 겪었던 좌절과 실의를 극복하기 위한 고군분투, 고난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나 환희를 향해 나아갔던 작곡가 자신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촉망받던 젊은 피아노 작곡가로서 회심의 대작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대참패로 라흐마니노프는 절망의 나락으로 내동댕이 쳐졌고 실의에 빠져 신경쇠약에 걸려 3년간 아무 곡도 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부러져버렸다. 여러 시간 스스로 질문하고 또 회의해본 결과, 나는 작곡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뿌리 깊은 무감각이 날 점령해 버렸다. 나는 낮 시간의 절반 이상을 침대에 누워 파괴되어 버린 내 생애를 한탄하면서 보내고 있다.” (클래식 명곡 명연주, 황장원)


피아노 협주곡 1번의 대참패의 늪에서 가까스로 써낸 곡을 들고 존경했던 톨스토이를 찾아갔으나 비판을 받았고 사촌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려 했으나 부모님과 러시아 정교회의 반대에 그의 늪은 더 깊어만 가고 창작력은 회복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만난 달 박사의 자기 암시 치료로 자신감을 되찾고 도전한 두 번째 피아노 협주곡으로 라흐마니노프는 대성공을 거두어 글리카 상을 수상하며 명예를 회복하였을 뿐 아니라 앞으로 러시아 낭만주의를 이끌어 갈 거인의 날개를 활짝 펴게 된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지금 겪고 있는 길고도 깊은 절망의 심연을 극복하고 환희로 나아가겠다는 아들의 의지였다.

대견한 놈.


며칠 후, 고1 담임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원석이가 표정이 없고 얼굴이 너무 안 좋다는 것이었다.

학부모 총회 때, “큰일이 있지 않는 한 연락드리지 않으니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해주세요.”라고 했던 담임선생님이 전화를 주셨다는 사실만으로 사태의 심각성이 파악됐다. 담임선생님도 뭐라고 해야 할지 난감하신 것 같아서 너무 걱정 마시라고 안심시켜드렸다.


“인생 최초로 시작한 입시공부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막대한 공부량과 내용에 압도되고 부족한 시간에 쫓기니 표정이 좋을 리가 없을 거예요. 조금씩 잘 헤쳐 나갈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선생님께서 바쁘신데도 항상 관심 갖고 신경 써주셔서 너무 안심이 되고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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