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그들은 혜성처럼 나타났다.. 고 하기엔 등장은 초라했다. '특종 TV연예'라는 MBC 프로그램에 신인 소개 코너로 데뷔한 그들은 당대 가요계에서 내로라하는 심사위원들에게 10점 만점에 7.8점이라는 다소 초라한 점수와 멜로디 라인이 약하고 새로운 음악을 시도한 것에 비해 가사는 새롭지 못하다는 혹평을 들으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두둥!! '서태지와 아이들' 언제나 그렇듯 영웅의 등장은 생각보다 초라하여 그들의 행보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나이를 말하기보다 왠지 중1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은 내 사춘기 시절 그때 서태지와 아이들은 대한민국 소녀들의 가슴팍에 날아와 꽂혔다. 인류 역사의 B.C와 A.D를 예수의 탄생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것처럼 나는 감히 대한민국 가요계의 역사는 서태지와 아이들(이후 '서태지'로 줄임)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서태지가 당시엔 생소했던 랩/ 힙합 리듬에 락을 접목한 획기적인 음악으로 가요계에 등장한 후 폭발적인 인기와 문화 현상을 일으키면서 이후 '듀스', '룰라', '솔리드', 그리고 지금 아이돌의 시조새가 되는 'HOT', '젝스키스' 등 다 열거하기에도 벅찬 가요계의 큰 획을 그은 가수들이 잇달아 새로운 퍼포먼스와 새로운 형식의 곡들을 가지고 나와 대한민국 가요계의 변혁을 불러온 동시에 르네상스를 함께 이루었으니 말이다.
서태지 때에 비로소 연예인들의 의상이나 액세서리 등을 협찬하는 마케팅이 자리잡기 시작했고 한 앨범의 활동이 끝나면 휴식기를 가지며 다음 앨범을 준비하고 이후 '컴백'을 하는 형식의 음악 활동이 이제는 보편화되어있다. 더욱이 서태지는 음악 저작권에 대한 창작자의 권리를 확실하게 자리 잡도록 앞서서 총대를 맨 가요계의 혁명가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연히 나는 서태지의 덕후였다. 물론 그 당시엔 덕후라는 말이 없었으니 대신 열성 팬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자유롭지 못한 집안의 분위기 때문에 그 당시 내 친구들처럼 서태지의 집을 찾아가 죽치고 있거나 만나서 사진을 찍거나 공연을 보러 가거나 하는 호사를 누릴 수는 없었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에서 그들을 향한 덕질을 뭉근하고 진중하게 이어갔다.
그들의 기나긴 랩 가사를 외우고 (노래는 물론이고) 사진과 기사를 수집하고 서태지와의 로맨스를 꿈꾸며 머릿속으로 수많은 뇌내 망상을 하면서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흘러갔다. 그리고 1996년 그들이 '창작의 고통'을 이유로 은퇴를 발표했을 때 나의 하늘은 무너져 내렸고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것은 이제 다시는 서태지를 볼 수없다는 절망감 보다도 그들이 고작 햇수로 5년밖에 활동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퇴를 선언했어야 했던 예의 그 표면적 이유 외에도 다른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거라는 내 나름의 뇌피셜을 하면서 흘렸던 눈물이었다.
'이 꽉 막힌 한국 사회가 결국 서태지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태지를 은퇴로 내몰았구나'
'아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러한 생각들이 한동안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서태지는 답답한 현실과 맞짱을 떠 주던 영웅이었고 청소년을 주체적 권리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 '철없는 어린것들'로 취급하던 어른들의 오만을 꼬집어 주던 '어른'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1집
현혹 되다.
그렇게 사춘기 시절을 보내고 성인이 되고 대학엘 가고 직장인이 되고 나이를 먹었다. 지금도 뒤돌아 보면 내가 덕질에 심취해 있었던 10대의 시절이 제일 반짝반짝했고 가슴이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그것은 내가 숨 막히게 좋아했던 대상이 있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치기 가득했던 10대 시절만의 고유한 특성 때문이었을까? 정답은 없지만 대부분은 그 시절 그 나이였기 때문에 가능한 반짝임이었다고 얘기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너무 슬프지 아니한가? 인생의 가장 열정적이고 반짝 거리는 시절이 그때였고 지금 물리적으로 그때가 지나 버린 거라면 이제 남은 나의 생에 더 이상의 하이라이트는 없다는 얘기인가? 그도 그럴 것이 이제는 삶에 안주하려는 내가 온통 나를 채우고 있다. 누구를 숨 막히게 사랑할 열정도 없고 새로운 삶을 꿈꾸는 것도 사치로 여겨지는 무기력한 나. 이제는 어떤 아름다운 사랑을 봐도 설레지 않는 내가, 나의 딱딱해진 심장이 언젠가부터 다시 사춘기 때의 심장처럼 뛰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떨림은 처음도 아닌데 생경하다. 나는 불혹에 '그들'에게 현혹되어 다시 덕후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