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머리가 성성하신 교장선생님은 수묵담채로 그린 풍경화 몇 점을 교장실에 걸면서 자랑스럽게 물어보셨다. 만면에 가득 인자한 웃음을 띄우신 채였다.
"음..... 잘 그리긴 하셨는데.... 수묵담채화라고 하기엔 사물의 표현이 너무 디테일하고 여백의 미가 없어 보여요"
초등학교 4~5학년쯤이었을 게다. 방학 중 '소집일'이라고 해서 방학중간에 학교에 가서 청소등의 잡일을 하다 오는 날이 있었는데 저 날이 그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차 싶었다. '너 왜 그랬니?'나는 속으로 되물었다. 그래도 교장선생님이신데 그리고 내가 감히 흉내 낼 수없을 만큼 잘 그린 그림이었는데 나는 객관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하여 지나치게 솔직하게 말해 버린 거였다. 그래도 괜찮겠지 스스로 뱉어낸 말을 마음속으로만 수습하면서 하루가 가고 다음날 다시 교장 선생님 방을 청소하게 되었는데.... 아뿔싸! 교장 선생님이 자랑스럽게 전시해 두셨던 수묵화는 단 한 장도 남김없이 사라져 있었다. 설마 나 때문에? 선생님께 너무너무 죄송했다.
살면서 종종 깨닫는다. 똥은 입으로도 쌀 수 있다.
살아온 날들을 되짚다 보면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되는 이불킥의 기억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이불킥 상황의 대부분은 '말'에서 비롯된다.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을 마치 진실인양 목소리를 높이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하기도 하지만 후회하게 되는 말의 대부분은 맞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적절치 못한 방법으로 했거나 때와 장소를 잘못 가려 하는 바람에 생겨난다.
이쯤에서 다시 상기하는 내 MBTI...T 성향인 나는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상대의 기분을 좋게 해 주려고 말에 장식품을 달지 않는다. 일례로 이제는 아이들이 모두 얼마나 귀하고 예쁜지 알지만 그걸 몰랐던 옛날의 나는 아이의 부모가 바로 곁에 있어도 아이가 진짜로 예쁘지 않으면 "아이가 너무 예뻐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우와~~~ 아이다~~"라는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소 어색하고 속이 뻔히 보이는 말로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아이가 그다지 귀엽진 않네요"라고 하지는 않았으니...
내겐 핸드폰 저장명을 '극 T 감동파괴자'로 등록해 놓은 지인이 있다. 그야말로 빈말을 할 줄 모르고 맞는 말만 하는 바람에 주변인의 호불호가 극명한 동생인데 어느 날 내 꿈에 그가 등장했다. 그 동생이 이사를 해서 새집에 집들이를 가기로 했는데 가는 길에 배가 너무 고픈 거다. 근처에서 샌드위치를 샀는데 막상 그 동생 집에 가보니 이사가 아니라 카페를 오픈한 거란다. (꿈인지라... 맥락은... 어찌어찌 그렇다) 그런데 카페 메뉴에 샌드위치가 있는 거다. 나는 정중히 동생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한데 너네 카페에 샌드위치가 있는 줄 몰랐네.. 커피랑 디저트 전부 이 카페에서 사 먹을 테니 샌드위치 사온 걸 여기서 좀 먹으면 안 될까?"
"안 되죠 누나! 그건 예의가 아니죠. 정드시려면 콜키지를 내시던가요."
"뭐? 너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니?"
하다 결국은 "그래 네 말이 맞긴 하다" 수긍하며 꿈에서 깬 적이 있다. 이 꿈 얘기를 그 당사자에게 하니 돌아오는 답변이 어김없다.
"그게 맞죠 누나! 그 꿈이 진짜였어도 저는 그렇게 말했을 거예요."
역시~~ 하며 웃어넘긴 에피소드였지만 더불어 많은 생각을 했다. 그 '극 T'동생을 내가 이해하고 있었고 그 상황이 꿈이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러고 보면 이 모든 건 어떤 말을 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결국 '화법'의 문제. 맞는 말을 예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하게 된다.
지혜롭고 예쁜 말은 천냥 빚을 갚기도 하고 사람을 감동시켜 새 삶을 살게도 하지만 좋은 약은 입에 쓰다며 가시 돋친 말을 해대면 원수를 지거나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게 말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그 말에 얻어맞는 사람을 아플 수 있다.
시간을 되돌려 교장 선생님께서 그림을 보여 주셨던 그때로 돌아간다면 "정말 그림이 멋져요!" 단 마디를 해드리고 싶다. 어떠한 미사여구보다 더 낫지 아니한가? 그리고 실제로 그 그림은 잘 그린 그림이었다.
'말을 하려거든 그 말이 침묵보다 가치 있는 것이어야 한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과연 나의 말은 매사에 침묵보다 가치 있는가 되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