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의 머리카락

정체성에 대하여

by 수키니피그

어릴 적 보았던 국산 애니메이션 중에 '머털도사'라는 만화가 있다.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분명한 건 머털도사 머털이의 기묘한 도술은 머리카락에서 나오는 거였다. 도술을 부릴 때면 언제나 부스스한 머리털을 삐쭉빼쭉 세우곤 했었다. 보면서 생각했다.

'어? 삼손도 머리카락에서 힘이 나오는데?' 그때는 어려서 머털이와 삼손이 그들의 머리카락에서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 것에 대해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 'T'적 사고가 발달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니... 머털이는 만화니까 그렇다 치고 삼손은 왜?

삼손이 머리털을 깎이고 나서 왜 그렇게도 처참한 신세로 전락했는지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 시작했다. 그가 나실인 이어서? 나실인은 삭도(가위나, 면도칼)를 몸에 쓰면 안 되는 규율이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는 이미 삭도를 대지 말라는 규율뿐 아니라 포도에서 나는 소산물 즉,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는 규율을 자신이 베푼 잔치에서 어겼고, 시체 등 부정한 것과 접촉하면 안 된다는 규율도 자신이 죽인 사자의 시체에서 벌꿀을 취하여 먹었을 때 이미 어긴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울트라 초특급 핵펀치의 힘은 그대로였으니 말이다.


머털이2 2025-01-31 201235.jpg 머털이



그렇다면 결정적으로 머리를 깎였을 때 사사로서의 능력이 소멸하였던 진짜 이유가 뭐였을까? 사랑했던 여자의 배신으로 인한 충격? 아니 아니 그건 아닐 것 같다.


삼손이 음주를 하였을 때, 혈기 왕성한 장사였던 그에게 술 따위는 자신을 약하게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다음날이면 숙취도 술을 마셨던 기억도 말끔히 사라져 있지 않았을까?

삼손이 죽은 사자의 시체에서 꿀을 취하여 먹었을 때 그는 그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꿀을 그의 부모에게 가져다주면서도 그 꿀이 사자 시체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했다면 괜찮다는 안일한 생각을 했을 수 있다.

그런데 머리카락은 달랐다. 그가 자고 일어났을 때 그는 자신의 모습이 예전과 확연히 다르다는 걸 바로 알았을 것이다. 그때 삼손의 양심이 말한다.

'너는 이전에도 나실인으로서의 규율을 어겼어! 아무렇지 않았고 아무도 몰랐다고 해서 그 사실이 하나님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건 아니야. 자 근데 지금의 너의 모습은 어때? 너의 긴 머리카락이 잘려 나간 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이건 숨길 수도 없어. 넌 이제 나실인으로 보이지도 않아! 너는 누구야?'

삼손의 정체성이 부정당하는 순간이다.

삼손이 가졌던 힘은 결국 머리카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나실인, 곧 하나님께 구별된 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었을 때 발현되는 것이었다.




나에게 정체성은 나를 나로 바로 서게 하는 동기이자 힘이다. 결국 나는 누구인가?

언제나 그랬던 거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헷갈리는 순간 방황이 시작되고 방향은 상실 됐다. 그러나 방향을 잃어도 어떤가 언제든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오면 그만이다. 그렇게 매번 실수하고 반성하며 되돌아온 세월이었다. 아직 새해의 초입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향하여 다시 영점을 맞출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매일매일을 이런 마음가짐으로 갈음하며 살아가는 것도 참 좋은 일인 것 같다.


keyword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