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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 제작기 05] 메모

by 기은

2020년 10월 7일, 나는 휴대전화 메모 앱에 이런 메모를 남겼다.


단편영화.

번데기 발음이 고민인 사람의 이야기


나는 자주 이런 식의 메모를 남긴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것을 떠올린 날짜와 함께 그 내용을 대략이나마 적어두는 것이다. 한창 음악 작업을 할 때에 그것은 노래 제목과 장르와 노랫말과 음성 녹음의 형태를 띠었고,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는 제목과 대강의 줄거리가 되었다. 가끔은 이도저도 아닌, 시에서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문장이 떠오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제목과 내용이라는 나름의 완결성을 지닌 형태로 메모가 나오곤 했다.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나왔다.


이렇게 남긴 메모는 차곡차곡 쌓여 언젠가 정식으로 작업할 때를 기다리는 창작의 재료가 되어 주었다. 작업이 되는 것보다 작업 되지 않는 아이디어가 훨씬 많지만 메모를 남기는 일 자체가 창작을 위한 짧은 연습이 되어준 셈이다. 딱히 새롭거나 남다른 행동은 아니다. 어느 분야든 창작을 하(거나 하려 하)는 사람이라면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메모를 남길 테니까.


번데기의 경우 위의 메모를 적기 전에 랩 가사를 위해 따로 메모를 적어 두기도 했었다. 쎄쎄쎄처럼 초등학생 때 여자아이들이 하던 손 놀이(“번데기, 번데기, 번번데기데기”)를 차용한 가사였다. 대략의 후렴구만 적어둔 탓인지, 아니면 랩 가사와 단편영화라는 다른 분야를 위한 내용 탓인지 나는 이런 메모를 남겼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새로 메모를 남겼다.


이렇게 남은 번데기라는 새 메모는 처음 그 내용이 작성된 때로부터 대략 2년이 지난 2022년 10월 21일에 아래의 내용이 추가된다.


방송작가 7년차.

이제는 카메라 뒤가 아닌 앞에 서는 이가 되기 위해 아나운서 학원에 가다.

번데기 발음을 고치기 위해.

학원 입학 상담.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봐요.

네?

방금 한 말 다시 말해 보시라고요.

아.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다시.

할 수 있을까요?

천천히. 입을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좀 더 해보면 되겠네.


위의 내용이 추가된 날짜는 나의 첫 단편영화인 〈내 자전거〉의 촬영을 마치고 한 달쯤 지났을 때가 된다. 그때의 나는 영화 촬영이 끝난 뒤 다시 공무원 시험준비를 위해 도서관을 다니고 있었다. 도서관 책상에 수험서를 펼쳐 놓고는 언젠가 다시 영화를 작업하기를 기다리며 위의 메모를 남긴 것이다. 현장의 아쉬웠던 부분들과 지금 새 이야기를 작업한다면 가능할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던 때, 그 때 추가로 남긴 이 메모는 다시 한 동안 나의 휴대전화 속 메모리에 잠들게 된다. 처음 메모를 남긴 뒤, 새 내용을 추가하기까지의 시간 만큼을 다시 한 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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