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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 제작기 04] 그리고 또 개인적인 것

by 기은

자전거를 잃어버린 경험을 모티프로 한 단편영화 〈내 자전거〉를 촬영한 이듬 해, 나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정규과정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서 모든 입학생에게 과제로 나간, “나는 누구인가”를 주제로 한 5분 짜리 영상을 작업한다. “나”라는 인식주체에 관한 철학적 고민과 탐구 과정을 영상으로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한 생각보다 나는 나를 적당히 소개하면서 사람들이 지루하지 않게 느낄 만한 구성을 고민한다. 그 고민의 결과물은 〈흑역사〉라는 제목의 영상으로 완성된다.


그 영상은 대략 10여 년 전, 쇼미더머니3 참가 신청을 위해 찍었던 영상을 활용해 만들어졌다. 그 내용은 이렇다. 랩 네임까지 갖춘 과거의 내가 쇼미더머니에 지원하기 위해 래퍼로서 자신의 포부를 담은 가사로 비트에 맞춰 랩을 한다. 현재의 내가 그 영상을 보다 노트북을 덮는다. 부끄러움에 얼어붙은 현재의 내가 책을 펴 들어 그 안으로 숨는다. 그 책의 제목은 『다큐의 기술』이다. 이 영상은 다큐이자 기술(記述)인 셈이다.


그 영상 대로 나는 한 때 래퍼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쇼미더머니에 지원하고 믹스테이프를 만드는 등 나름의 시도를 했다. 그 시도는 이렇다 할 성과는 내지 못하고 “흑역사”라 불리는 과거가 되었다. 이것은 왜 흑역사가 됐을까?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해서? 그 이유야 어쨌든 나는 입학 전 과제로 〈흑역사〉를 작업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창작을 한다는 건 결국 흑역사를 만드는 일이다.

지금 우리가 진지하게 만든 작품은 먼 훗날 흑역사가 된다.

그럴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만 한다.

흑역사라는 말은 곧 그 사람이 그만큼 과거보다 발전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과 별개로 내가 래퍼로서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지 않은 데에는 나의 어딘가 못나게 들리는 발음과 발성의 영향이 컸다. 특히 번데기 발음이 고민이었다. 랩의 전달력을 위해 발음을 신경쓰다보니 나의 모든 발음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특히 ‘ㅅ’ 소리가 그랬다. 한번 이 소리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니 이상하게 혀가 경직되는 느낌이었다. 녹음한 소리를 들어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ㅅ’ 소리의 주파수가 원래 녹음시 사람 귀에 거슬린다는 사실을 알아도 그랬다.


이 때의 해결되지 않은 고민은 이후 나의 휴대전화 메모 앱에 번데기란 제목의 메모로 남았다. 그때 남긴 메모의 내용은 이렇다.


단편영화.

번데기 발음이 고민인 사람의 이야기


메모를 쓴 날짜는 2020년 10월 7일. 이날부터 지금까지 이 메모는 나의 해결되지 않은 고민과 함께 나의 기억 한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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