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이 Oct 31. 2023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2번째 책 | 북호텔 - 외젠 다비


안녕히 가세요!
잊지 말고 또 오세요!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십진 분류표에 따라 책을 분류하기보다는 직원들이 직접 시의적절하게 책을 큐레이팅하는 곳이라는 게 굉장히 신선했고, 마음에 들었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뜨거웠다. 추위를 극도로 많이 타는 탓에 겨울보다 여름을 좋아하는 친구 A도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세상에, 내가 겨울을 기다리게 될 줄은 몰랐어." 서점의 한 켠에는 '여름' 큐레이팅이 생겼다.


책 매대의 중간에 시원하고 기분 좋은 여름 새싹의 연두색을 입은 책이 있었다. 외젠 다비의 '북호텔'이었다. 다른 책들은 제목에 '여름'이 있던데, 이 책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충동적으로 구매했다. 사람의 호기심은 때론 이토록 단순하다.


2월이니까 해가 빨리 져서 그렇지만
여름이 되면 복도는 아주 밝은 데다가
눈이 부시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찬란했던 그들의 여름


파리의 소시민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르쿠르뵈르 부부. 우연한 기회에 사촌의 돈을 빌려 뱃사공들이 이따금씩 머물다 가던 허름한 호텔을 인수하고, 이름을 '북호텔'로 짓는다. (필자는 이 책의 제목이 북(book) 호텔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북쪽에 위치한 호텔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시작은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선 사람의 붉게 달아오른 상기된 표정 안에는 복잡한 생각들이 뒤얽혀 있는 법이다. 르쿠르뵈르 부부는 자신감에 한껏 취하고, 열정과 기대감이 샘솟는 것을 느끼면서도, 한순간에 모든 마음이 식으며 엄습해 오는 불안감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감히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있을까. ‘오랫동안 탐내던 소유지를 차지하고자 하는 농부의 조급한 감정’을 갖고 있던 그들은 이토록 달콤하고 강렬한 새로운 시작을 거부할 수 없다. 그들에게 손대지 않은 새로운 세계가 찾아온 것이다. ‘드디어 하나의 기회, 나날을 아름답게 하고, 삶을 정착시킬 기회가....’


모든 것이 다 변할 거야,
이제부터는.


북호텔의 영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르쿠르뵈르 가족의 뜨거운 열정을 품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르쿠르뵈르는 호텔을 인수하면서 생각했다. 숙박인에게 방이란 잠을 자기 위한 곳 그 이상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들의 북호텔은 가정이었다. 르쿠르뵈르 부부와 북호텔에 머물렀던 모든 사람들의 열정과 사랑, 마지막 찬란함을 간직하고 있는 시공간이었다.


불안정하고 덧없는 인간들이
의지할 곳을 찾고 있는 마흔 개의 방들
한가운데 선 르쿠르뵈르의 주위는
온통 침묵이었고
휴식이 있을 뿐이었다


북호텔에 머물렀던 사람들을, 이 소설은 함부로 평가하고 판단하지 않는다. 머무르고 떠남이 반복될 뿐이다. 어떠한 이유로 이곳에 오게 되었고, 어떤 삶을 살았고, 또 각자의 이유로 자신의 길을 찾아 북호텔을 떠나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북호텔을 거쳐간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는 때론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고, 기쁘고, 슬프고, 우아하고, 천박하지만, 이 또한 모두 이야기다.


여러 해를 거치며 북호텔에는 많은 이야기가 쌓여갔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떠나갔다.


몇 년 전 호텔에 머물렀던 드보르제 영감은 어느 날 초췌한 모습으로 호텔을 다시 찾아온다. 치매가 있는 듯 많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살았던 방을 보고 싶다며 방문한 그를 르쿠르뵈르 부부는 따듯하게 대접한다. 떠나는 그의 뒤에서 부부는 나지막이 외친다.


안녕히 가세요!
잊지 말고 또 오세요


부부는 드보르제 영감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보는 것이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들은 거기서 자신들의 마지막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시간의 흐름은 르쿠르뵈르 부부에게도 공평하게 적용되는 법이니까.


얼마 후, 호텔이 큰 기업에 인수될 거라는 소문이 들려온다.


시간의 흐름은 산업 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호텔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모던 피혁’이라는 거대한 사무실을 짓는다고 한다. 한낱 소시민인 르쿠르뵈르 부부는 각종 계약과 권력으로 퇴거를 강요하는 관계자들에게 저항할 수 없다.


보상을 해 준다고 했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드로브제 영감의 뒷모습을 보며 마지막이라는 걸 직감했듯이, 르쿠르뵈르 부부는 알고 있었다. 북호텔 또한 르쿠르뵈르 부부가 열정과 사랑을 담아 일궈낸 일생의 마지막 찬란함이었다는 것을.


그곳에 머물다 가며 써 내려갔던, 또 앞으로 써 내려갈 이야기가 이제는 없을 것임을.



추천사


외젠 다비는 소설 속 서술자의 입을 빌려, 호텔의 사람들을 ’대단치 않은 직업에 못 박힌 채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살고 있다‘고 평한다. 그리고 바로 다다음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만약 파리가 지진으로 파괴되어 버리면
재건에 필요할 인간들이었다.


소시민들이다.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실수를 하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혼동하는 보통 사람들이다. 그러나 결국 삶을 꾸려나가고, 다른 사람들을 지키고, 나라를 구하는 것 또한 보통 사람들에 의해 이뤄진다. 보통 사람들은 결코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아닌, 그저 ’나와 닮은 남‘일 뿐이다.


보통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그저 삶이다. 삶은 곧 이야기다. 외젠 다비의 북호텔 속에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또 남의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외젠 다비의 소설은 남이 아닌, 우리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위안을 받는다. 인간의 존재는 사회 속에 존재할 때만이 성립되기에 사회를 피할 수는 없다. 사회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상처를 입었을 때, 지치거나 힘에 부칠 때 우리는 자기만의 안전한 공간으로 향한다.


북호텔의 숙박인들에게는 그곳이 바로 북호텔이었다. 나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남에 대해 내가 수군거리지만, 결코 누군가를 배척하거나 따돌리지 않는 곳. 미우나 고우나 정든 나의 집, 북호텔.


불이 반짝거리는 가게가 그리웠다.
다른 사람들의 삶은
그 자신을 잊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루의 끝, 지친 마음에 안식처를 찾고 있다면. 그저 누군가가 내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나의 반응을 바라지 않고 주절주절 끝없이 말해주었으면 하는 날. 멍하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을 가만히 두고 싶은 날. 외젠 다비의 <북호텔>에서 머물다 가는 건 어떨까.



에세이 <100권의 책을 읽으면 달라질까?>는
매주 화요일, 목요일 오전 10시에 업데이트됩니다.
by. 작가 수이




 





이전 02화 가장? 그거 뭔데, 어떻게 하는 건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