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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독성 Jan 11. 2024

살림살이가 소곤거리는 시간

찬장 안에는 쓰지는 않지만 버리긴 아까운 살림살이 들이 가득하다. 화단에는 장독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담소를 나눈다. 텅텅 비어있는 항아리에 무언가 채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나의 장독에만 어머님이 몇 년 전 담아놓은 소금이 들어있다. 김치 한번 혼자 담가본 일이 없기에 굵은소금은 줄어들지도 않는다. 이렇게 살림에 재주가 없다. 아니, 관심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2년 신혼 생활을 하고 본가로 들어가 시어머님과 함께 살 예정이었다. 어차피 합칠 살림인데 관심도 없는 그릇 사는 돈이 아까웠다고나 할까. 어머님 살림살이를 갖다 썼다. 밥그릇, 국그릇, 냄비에 국자, 수저까지. 나름 새 물건들도 있었다. 결혼 선물로 받은 냄비 세트도 있었고, 전자 제품을 살 때 사은품으로 반찬 그릇도 넉넉히 받았다. 엄마는 그래도 신혼인데 예쁜 그릇 한 세트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그릇 세트를 손수 골라 보내셨다. 친정 엄마의 마음을 헤아린답시고 예쁜 그릇에 두 사람 몫의 음식을 차려냈다. 딱히 취미가 있지는 않지만 요리도 가끔 해봤다. 신혼이니깐.


2년 후 우리는 본가로 들어왔다. 어머님은 시누이 집으로 출퇴근을 하셨다. 아이가 한 명이 되고, 두 명이 되고,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나면서 시누이 집에 계시는 날이 많아졌다. 아이 둘이 부산스럽게 뛰어다니기 시작하자 점점 더 집에 오시는 날이 줄었다. 셋째가 생기자 어머님은 쿨하게 집에 있는 짐을 정리하기도 귀찮다시며 그냥 알아서 버리라셨다. 이젠 시누네를 가면 어머님이 살림을 하시고 나는 손님이다. 우리 집에서는 어머님이 소파에서 쉬신다. 이젠 완전히 살림살이가 분리됐다.

 

이젠 내가 돌보아야 될 살림살이들이라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걸까. 하나, 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짝 안 맞는 컵, 오래된 플라스틱 반찬 통, 안 쓰는 일회용품들, 벗겨진 양은 냄비 등등. 그래도 못 버리는 것들이 허다하다. 조심스러웠던 어머님의 살림살이들을 이제 마르고 닳도록 써봐야겠다. 제사 때 탕국을 끓이는 커다란 들통, 된장찌개 끓일 때 쓰는 작은 뚝배기, 꿀물 탈 때 딱 좋은 티스푼, 밥솥의 밥이 조금 남았을 때 잠깐 담아두기 좋은 스텐 찬합.


오늘도 어머님의 커다란 스텐 냄비에 김치찌개를 한솥 끓였다. 검은색 플라스틱 손잡이가 덜렁거리는 국자로 크게 한국자 떠서 여전히 튼튼한 커다란 꽃무늬 냉면기에 퍼 나른다. 귀퉁이 한쪽이 떨어진 법랑 찻주전자에 물을 끓여 아이가 먹고 싶다던 보리차를 우린다. 무게감 있는 유리 화병에는 꽃도 한송이 꽂아둔다.


부엌을 정리하다 장독대도 생각났다. 사람이 한 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커다란 장독 하나는 생뚱맞게 옥상에 홀로 덩그러니 있다. 안에 뭐가 들었을까 뚜껑을 열어보려다 진짜 누구라도 들어있을까 봐 열지를 못했다. 화단의 작은 장독대들은 괜히 비어있는 그 마음이 짠하다. 주인을 잘못 만나 쓰임을 다하지 못하는 물건들이 아우성이다.


담가보지도 않은 된장 생각을 해본다. 외갓집에서 쿰쿰한 메주 냄새에 코를 찡긋거리던 어린이의 마음에서 벗어나 누런 콩을 삶을 날이 있을까. 푹 삶은 콩을 이리저리 치덕이며 메주 모양 만들어 짚으로 엮어 본다. 주렁주렁 달린 메주를 띄우며 인생을 곰삮이는 시간이 오려나. 메주가 익어가는 날 동안 내 마음도 숙성시키고, 시간도 뜸 들이고, 냄새도 진동하고, 그 냄새에 취하고, 냄새가 나지도 않을 만큼 익숙해지려나.


유독 눈이 많이 내리는 올 겨울, 항아리 위로 소복이 쌓여 소곤대는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외할머니와 엄마가 메주를 빚는 소리. 어머님이 김장을 하려 항아리 뚜껑을 열고 굵은소금을 한 대접 퍼올리던 소리. 이젠 내가 목소리를 더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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