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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독성 Jan 04. 2024

소원을 말해봐.

이따금 현관의 자그마한 창문 사이로 햇살이 들어온다. 살포시 들어오는 빛 사이로 뽀얀 먼지들이 보글보글 모습을 드러낸다. 그늘이 걷히는 빛 사이로 얼굴을 내민 도자기 틈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수건으로 문지르면 어느새 퐁 하고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올 것만 같다.


뒤주 위에는 뭐가 그리 많은지, 이것저것 못 버릴 물건들이 가득하다. 커다란 나무 쟁반, 박으로 만든 진짜 바가지, 놀부가 흥부를 때렸을 때 썼을법한 커다란 주걱, 촛대, 장식장, 자그마한 좌경(드라마 보면 나오는 연지 곤지 찍을 때 보는 거울)까지. 장식장 위쪽으로는 도자기들도 옹기종기 모여있다. 원래 입고 있던 흰색 바탕에 회색 먼지로 부풀어진 털옷을 입고 자리를 지킨다. 안타깝다. 닦아보려 까치발을 들었다 이내 발뒤꿈치를 내려놨다. 손이 안 닿는다는 핑계로 오늘도 램프의 요정 지니는 못 불렀다.


언제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도자기를 보면서 사람들은 <TV쇼 진품명품>에 한번 나가봐야 되는 게 아니냐며 이야기들을 한다. 도자기를 곱게 잘 닦아 양 옆구리에 끼고 감정 위원들 앞에 내놓는다. 미리 준비한 종이에 혹시 모르니 미친 척 1억을 적을까 싶다가 그건 좀 너무 큰 행운이니 좀 더 심사숙고 한 1,000만 원, 그것도 좀 과한 것 같으니 저 사람은 돈이 목적이 아니라 진짜 도자기의 역사가 그냥 궁금해서 나온가 보네 할 정도의 액수 100만 원을 슬쩍 적어 내민다. 감정 위원들이 하나 둘 나와 하얀 장갑을 끼고 돋보기로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 거리며 살펴본다. 제발 제발을 속으로 외치며 돋보기의 눈을 따라 행운을 빌어본다. 이 도자기의 감정가는 얼마일까요를 외치는 사회자의 말 한마디에 가슴은 폭발할 것 같다. 100만 원으로  뭐 하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올라 얼굴이 터지기 직전 세명의 감정 위원들의 감정가가 공개된다.


과연 얼마일까요.

10만 원, 10,000원, 50,000원


안타깝다는 사회자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기대로 벅차오르던 얼굴은 쪽팔림으로 터져버리고 만다. 이건 백자도 청자도 아닌 그냥 도자기는 맞다는 뻔한 말을 듣고 다시 옆구리에 도자기를 끼고 쓸쓸히 퇴장한다.


그래서 포기한 감정. 조선시대 물건이건, 동네 시장에서 사 온 만 원짜리든 상관이 없다. 우리 집 보물에 값을 매기고 싶지 않아 졌다. 우리가 그러했듯, 대대손손 고이 모셔둘 참이다. 세상만사 다 알고 살면 얼마나 삶이 재미가 없을까. 사람들이 로또를 사는 이유는 일주일 동안 로또 당첨의 꿈을 안고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집 도자기는 나만의 로또라고나 할까. 언제 당첨될지 모르는 미지의 존재이지만 그 자체만으로 무한한 꿈을 품게 하는 행운의 복권이다.


어김없이 시간은 흘렀고 1년을 또 살아냈다. 하얀 눈이 폴폴 쌓이던 장독대를 바라보며 몽글몽글 한 마음이 피어오르는 겨울 한편에서 호호 불어가며 붕어빵을 먹는 시간, 뜨끈하게 푹 쪄낸 고구마 껍질을 벗겨가며 한입 베어무는 소소한 시간들에 파묻혀 1년을 돌아봤다. 좋지 않은 날도, 좋았던 날도 다 우리가 살아낸 시간이었다. 무엇하나 버릴 게 없었다. 12월 31일이라는 눈 덮인 마무리의 시간을 지나 세상을 뚫고 나온 새해가 어김없이 시작됐다. 1월 1일, 모든 이들이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출발선에 섰다. 함께 발을 맞춰 그 선을 밟아본다. 도자기 속에 있을지도 모르는 로또 같은 지니에게 나지막이 빌어본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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