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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독성 Dec 28. 2023

외풍의 선물

겨울의 온도를 받아낸 창틀이 꽁꽁 얼어붙었다. 검은 창틀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하얀색, 얼어버린 창을 열수도 닫을 수도 없이 멈춰버렸다. 분명히 2 중창인데, 바람을 못 막는다. 바깥쪽 창은 까만색으로 칠해진 알루미늄 새시가 분명하다. 문을 열 때마다 뻑뻑해서 힘껏 밀어야 한다. 안쪽 창은 보기에만 근사한 나무 창틀이다. 창문 앞에 손을 대면 손끝으로 바람이 타고 흐른다. 창문에서 시작된 차가운 기류는 벽을 타고 계속 흐른다. 두꺼운 패딩 커튼도 하나 더 달았건만. 벌떡 일어나 외쳤다.


"안 되겠다. 나가자!"


비장한 각오로 방안 외풍의 싸늘한 기운을 피해 혹한기 거실 캠프를 선언했다. 아이들은 환호했고, 신랑은 이해가 안된다는 듯 바라봤다.(수면독립에 성공한 아빠 여기 있습니다.)


거실에서 자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막내는 겨울 방학 기념으로 독감을 선물 받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크리스마스와 첫째 생일 기념 레스토랑 외식은 물 건너갔다. 매번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라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사람들이 물어볼 때도 아빠가 좋다던 아이는 아빠는 가라 하고 엄마를 찾는다. 세상 발랄한 아이가 힘이 없다. 평소와 다른 차분함에 마음이 한번 더 쓰리다. 어차피 우리는 같은 공기를 마시고 바이러스를 주고받는 운명공동체다. 차가운 공기가 아픈 아이를 더 아프게 할까 봐 걱정이었고, 사회적 거리 두기는 못하더라도 기침하는 침이라도 맞지 않도록 떨어뜨려놓고 싶었다.(물론 막내의 기침 세례는 내 얼굴로 다 막아냈다.)








생각해 보니 지금 우리 집 위풍은 위풍도 아니다. 세발의 피. 대학원 다닐 무렵 엄마는 더 이상 못 버틴다며 조그마한 아파트를 자가에서 월세로 그마저도 힘들다며 이사를 했다.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간 집은 추웠다. 사글세 양옥집의 창문은 커튼 한 장 걸치지 않은 채 온몸으로 바람에 맞서고 있었다. 아무리 힘주어 닫아도 아귀가 맞지 않아 손가락 하나의 틈이 남았다. 틈에서 새어 나오는 위풍은 마음까지 시리게 했다. 코끝에서 벌름거리는 숨소리들이 가로등 불빛으로 새어나갔다. 뭘 그리 밝게 빛나는지. 지나가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 묻히고 싶던 나지막한 소리를 기억한다.


패딩 점퍼로 몸을 감싸고 두꺼운 이불에 파묻혀 냉랭한 기운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차가운 기운은 쉽사리 도망가지 않았다. 뜨거운 온기는 바라지도 않았는데, 자꾸만 뺨으로 차가운 바람이 스쳤다. 며칠을 꼬박 겨울바람과 싸웠다. 힘겨운 숨이지만 가족들과 함께 했기에 슬프지는 않았다. 서울 자취방으로 돌아오자 새삼 방안 가득한 따뜻함이 미안했다. 고향에 내려가는 것이 뜸해졌다.  


다행히 몇 년 뒤 창문이 잘 닫히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즈음 비가 억수 같이 내리던 장마철에 그때의 추위를 피해 더운 나라 인도네시아로 도망가버렸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추운 날의 아빠, 엄마만 기억하고 떠났다면 마음이 꽁꽁 얼어붙을 것만 같았으니깐. 그때의 위풍이 지나간 뒤 우리는 더 단단해졌다. 아니, 내가 단단해졌다. 도망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차가운 세상에서 뛰쳐나와 다른 온도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감사하다.








 그날의 차디찬 밤공기를 떠올려도 이젠 눈가가 시리지 않다. 우리 집 위풍은 견딜 수 있는 바람이다. 겨울, 추운 계절이란 걸 떠올리게 해주는 잠시 잠깐의 바람일 뿐. 겨울의 온도를 느낄 뿐이다. 그때의 찬 바람이 이젠 추억이 되었듯 오늘의 작은 바람결이 만든 혹한기 거실 잠자리 이벤트도 좋은 추억이 될 수 있겠지. 픔을 기억하고 마주하게 된 바람결은 뜻밖의 선물을 가져다줬다. 지난날의 기억을 돌이켜보는 힘과 그것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힘.


아빠, 엄마가 나를 지켜줬듯 이제 나는 우리 아이들을 지켜야겠다. 작은 위풍이 흘러나와 아이들에게 시린 바람이 되지 않도록 지켜줘야겠다. 독하디 독한 온갖 바이러스들이 판을 치며 돌아다니지만 지켜줘야겠다.  동지의 밤은 깊고 어둡지만 아이들을 보듬는 이 시간을 즐겨야지. 긴긴밤을 견뎌내면 왠지 내일 떠오르는 해는  반짝이는 빛나는 시간으로 물들여줄 것 같다.


며칠 동안 열지 못했던 창문을 열었다. 한낮의 따스함이 녹여낸 얼음은 반짝이는 액체가 되어 흘렀다. 그렇게 추억을 톺아보던 이야기도 흘렀다. 얼었다 녹은 세상에서 또 우리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겠지. 훗날, 그런 때가 있었다 말을 주고받겠지. 그때도 좋았다는 말을 하면서 웃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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