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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독성 Jan 18. 2024

계절을 기다린다.

유독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이다. 얼마 전, 41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 2015년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후 8년 만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도 지냈다. 이러다 영화 설국영화 처럼 되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날 때가 있다. 만약을 대비해서 재난 가방이라도 싸놔야 되는 건 아닐까 괜히 걱정하다 고개를 저었다. 눈이 오면 눈이 오는 아름다움을 느끼자고. 옆에 있는 남편은 오늘도 눈이 온다며 눈을 쓸러 나가야 한다며 얼굴이 내려앉았지만. 어쩌겠는가. 눈 내리는 날엔 온 세상이 하얀 세상인데. 내 마음도 포근해지는데. 쌓여가는 눈을 바라보며 지나간 사계절을 기억해 낸다.


우리 집 작은 화단에는 감나무, 소나무 그리고 영산홍이 있다. 햇살이 내리쬘 때면 빨간 잎이 반짝이던 단풍나무는 몇 년 전 죽어버렸다. 나무에 무지한 나의 과거를 반성한다. 밖에 사는 나무는 비만 맞으면 되는 줄 알았다. 가끔 물도 주고 해야 하는데, 그걸 몰랐다. 항상 잡초는 밀림처럼 우거져 있다. 강아지풀 따서 아이들 간지럼을 태우기 딱 좋은 풀밭이다. 잡초도 꽃이라며 자연의 그림을 바라보며 살았다. 이런 땅에 꽃을 심었으니, 얼마 못 가서 죽지. 추운 겨울 시린 바람이 추워 나만 꽁꽁 싸매고 다녔지, 식물들도 춥다는 걸 몰랐다. 겨울에 월동을 해줘야 한다는 걸 모르다니 이렇게 사람이 무식하다. 전혀 관리를 하지 않음에도 해마다 꽃을 피우는 영산홍은 효자다. 덩그러니 남아 있는 빈 화분들을 바라보며 따뜻해진 봄에는 뭐라도 심어봐야겠단 다짐을 해본다.


주차장 옆 살구나무 두 그루가 꽤 자랐다. 따스한 봄이 오면 제일 먼저 꽃을 피워 봄소식을 알려준다. 집 지은 지 20년이 되었으니, 그 사이 나무도 엄청 자랐다. 풍성한 꽃이 우리에게만 좋은 구경거리였나 보다. 옆집 아저씨는 나무가 너무 커서 집을 다 가린다며 좀 잘라 달라고 하셨다. 신랑은 또 안색이 좋지 않다. 일거리 하나 추가요. 꽃이라도 지면 잘랐으면 했는데, 앞뒤 사정 봐주며 기다리기는 힘들었다. 살구꽃이 만발하던 어느 날, 가지치기를 했다. 꽃 달린 가지 몇 개를 꺾어 아쉬워하는 나를 달래줬다. 개나리도 만발이다. 뒷집 할머니도 나무가 너무 무섭게 자라서 앞을 다 가린다며 잘라줬으면 했다. 힘든 기색이 역력한 신랑은 또 톱을 들었다. 전문성이 1도 없이 있는 힘껏 가치를 쳐냈다. 듬성듬성 시원하게 쳐냈다. 너무 잘랐더니 이번에는 너무 휑하다는 할머니 말씀에 가지를 붙일 수도 없고. 그래도 개나리는 봄마다 꽃을 피운다.


얼핏 보면 아주 아름다워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이런 걸까. 여름엔 모기와의 의도치 않은 동거가 시작된다. 화단을 포기하면 벌레와 이별할 수 있다는 신랑의 말에 항상 솔깃하지만 조금만 더 참아보겠다 한다. '모기쯤이야.'라고는 했지만, 모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잠에서 깬 아이가 몸 전체를 빨간 동그라미로 채점해 놓는 날이면 엄마의 마음은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른다. 왜 모기는 꼭 한 명만 집중 공격할까. 모기뿐만이 아니다. 밤에는 누가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온갖 벌레들이 득시글득시글. 항상 밤에는 문단속을 철저히 해야 한다. 오래된 이 집이 좋지만 벌레까지 사랑할 순 없었다.


모기의 공격이 뜸해질 때쯤 이면 가을이 찾아온다. 노란 치즈 가루 소복이 뿌려진 거리였다. 며칠 사이에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겨울바람을 가로막고 있다. 길에 은행잎들이 엄청 쌓였다며 예쁘다고 조잘거리는 나의 눈에 보이는 건 신랑의 어두운 낯빛. 아뿔싸. 신랑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썩은 미소로 답한다. 운치 좋은 은행잎 쌓인 집 앞 거리를 치우는 자는 그 사람이다. 어둠이 드리워지는 그의 낯빛에서 벌써부터 힘듦이 느껴진다.

가을이면 화단에 감도 따줘야 한다. 신랑이 떫은 감을 꺾어주며 글감이라 투척한다. 이런 감성 아니냐며 물어본다. 숙제인 건가. 관리를 안 해서 그런지 몇 년 동안 감나무에는 감이 까치밥 정도만 열렸다. 올해는 벌레가 꼬인다며 욕이란 욕은 다 먹으면서도 상한 과일, 야채를 던져 놓은 덕분인지 감이 주렁주렁 달렸다. 감을 먹겠다며 달려드는 아이가 귀여워 씻어서 쥐어줬다. 떫은 것도 맛있다며 몇 입 먹더니 도저히 못 먹겠는지 퉤퉤 뱉어버렸다. 엄마 말에는 무조건 반대로 대답하고 보는 4살의 삶에 시련이 닥쳤다. 진짜로 감은 떫었다. 하지만 나무에서 익은 홍시는 먹어본 것 중에 제일 맛있었다고 한다.


가을을 지나쳤음에도 소나무의 푸른 잎은 여전히 한결같다. 앙상한 감나무가 안 보일 정도로 소복하게 쌓인 눈 모자가 겨울밤의 운치를 더해준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쌓인 눈은 물로 흘렀다. 눈 녹는 소리를 들으며 계절을 기다린다.



눈 내린 소나무







옛날 옛날 한 옛날, 남자와 여자가 만나 둘은 결혼을 했고, 애를 낳았습니다. 자녀 계획은 둘이었으나, 어쩌다 셋이 됐어요. 알고 보니 그는 나무꾼이었습니다. 그는 철저한 계획형 인간인가 봅니다. 사슴의 말을 까먹지도 않고 셋을 낳자 날개옷을 주었습니다. 선녀는 자기가 선녀인 것도 까먹고 살았는데, 선녀옷을 보고 기억이 났어요. 애를 셋이나 낳아서 날개옷이 안 맞아요. 대충 손에 걸치고 애 둘은 옆구리에 끼고 날아보려 합니다. 허허, 남은 하나는 어찌합니까. 이래서 애가 셋이 되면 날개옷을 주라고 했나 봅니다.

선녀는 속상하지 않았어요. 사랑하는 나무꾼 그리고 아이들과 이곳에서 행복하니깐요. 그래서 선녀와 나무꾼은 오래오래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끝>


(가지치기하는 신랑을 보니 딱 나무꾼이더군요. 저는 뭐 선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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