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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독성 Jan 25. 2024

서로를 위한 거울

먼지 뽀얀 좌경을 펼쳐 세웠다. 커다란 활옷 소매 아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봉긋하게 내려온 빨간 치마 속에 무릎을 세워 앉았다. 귀밑머리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쓸어내렸다. 거울 속 뽀얀 얼굴의 연지곤지를 들여다본다. 새색시는 예쁘다. 그 옛날 거울 속 여인은 결혼이 먼저였을까. 사랑이 먼저였을까. 아니 결혼을 하고 싶어서 했을까.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좌경을 바라보며 그 시절의 여인들에게 물어본다.


연애를 하던 그 어느 날, 뜬금없이 결혼에 대해 논했다. 결혼 생각 의사부터 물었다. 결혼 생각이 있으면 거기까지 꿈을 꿔볼 참이었다. 결혼 생각이 없다면 연애만 할 참이었다. 결혼 생각이 있는, 비혼 주의는 아니었던 그에게 나를 위한 일종의 방어가 진지함을 불러일으켰다. 별생각 없던 결혼을 6개월 만에 하다니, 역시 인생은 순간이다. 결혼은 생각보다 쉬운 결정이었다.


어릴 때 먹던 쮸쮸바의 맛, 그 달짝지근한 달콤함에 혀를 내 준 이후로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순간의 달콤함이 설탕과 그저 냄새에 지나지 않을 인공 향료의 조합이라는 걸 깨달은 이후로 행복한 날은 드물었다. 왜 쓴 커피를 마시는 거냐며 알 수 없는 궁금함이 늘어갈 때 행복했다. 커피의 쓴 맛이 더욱 익숙해져 버린 이후에 삶은 행복한 날이 드물다. 그때의 맛과 지금의 맛이 다를 때가 있다. 목적 없던 연애의 달콤함과 결혼이라는 복합, 혼합, 사실주의 맛. 그 맛을 알아가는 중이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인생. 학교만 가면, 졸업만 하면, 취업만 하면, 결혼만 하면, 애만 낳으면, 애만 다 크면. 이런 미션을 하나씩 깰 때마다 도장 찍기를 반복한다. 백지가 다 채워지기까지의 인생 지도를 그리다 보면 생이 허무하게 끝날 것 같다. 다시 백지가 되지 않고 묘비에 새겨진 칭찬 스티커 개수에 어이없어하며 삶을 내려다보겠지. 무엇이 중요한 걸까.


거울에 보이는 새색시의 예쁜 얼굴만이 아닌 주위로 펼쳐지는 풍경까지 아 루르며 살아야 하는 삶이 결혼 아닐까. 그 너머를 보지 못해서 쓴맛만 느껴졌다. 나만 힘들다 생각했고, 누구나 다 그럴 거라 생각했고, 너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행복하려고 한 결혼인데,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예쁘지 않다고 투덜거리며 싸웠다. 이게 결혼이냐고 이럴 거면 왜 함께 하는 걸까 의문이었다. 말하는 법을 몰라 내가 선택 한 사람이 진정한 한 사람인지를 몰라 방황했다. 억울하면 울었고, 슬프면 울었고, 화나도 울었다. 왜 화가 났는지, 왜 우는지, 왜 아픈지를 말하는 법을 몰라서 또 울었다. 입술을 깨물며 마음으로 화풀이만 반복했다. 네가 이래서 네가 이랬잖아를 반복하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에 지쳐서 말문을 닫아버렸다.


세월은 흘렀고, 아이들은 많아졌고,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도 커졌다. 커피의 쓴맛 뒤에 남는 잔잔한 단내를 이젠 좀 알 것 같다. 결혼하길 잘했다 생각했던 마음은 엉뚱한 데에서 튀어나왔다. 둘이서 돈가스를 배불리 먹고 나오던 어느 날, 식당 문을 나서며 한 발자국 내딛자마자 굵은 빗방울이 후두두둑 떨어졌다. 소나기일 거라며, 대충 손으로 머리를 가려본다. 가파른 내리막 길을 뛰어내려오다 할머니 한분이 파지를 챙기고 계신 걸 보았다. 지팡이를 짚고 저걸 들고 여기를 내려가실 수 있을까. 우산도 없고, 비도 신경 쓰인다. 살짝 비켜갈까. 고민만 하던 사이, 신랑이 물었다.


"도와드릴까요?"


괜찮다 손사래 치는 할머니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음료수 캔이 한가득 들어있는 50리터 비닐봉지를 번쩍 들고 갔다. 구색이라도 맞추려 A4박스는 내가 들었다. 이제 괜찮다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랑은 다시 올라가 박스 더미를 가지고 내려왔다. 요즘엔 착한 척이라 할까 봐 오해할까 봐 보고도 못 본 척 그냥 지나치는 일들이 허다하다. 당연한 걸 고민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결혼 참 잘했다. 이런 사람이 내 사람이었지. 좌경 속 내 얼굴만 보이던 나날을 지나 함께 하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 손을 잡고 산책을 하시는 걸 보곤 한다. 할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하신지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다니신다. 언제나 지나칠 때마다 항상 그 모습 그대로 손을 맞잡고 다니시는 모습에 신랑이 불쑥 한마디를 건넸다.


"나중에 저분들처럼 내 손 잡아줘야 해."

"할아버지들이 아프면 할머니 손을 꼭 잡고 다니더라. 나중에 잘해. 근데 왜 할아버지들은 건강하면 저만치 앞에 가고 할머니들은 뒤따라 가는 걸까."


집 앞 대학병원 앞을 지날 때면 항상 본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건강한 할아버지들은 항상 멀찌감치 앞장을 서고 할머니는 뒤따라 간다. 웃으며 우리 둘은 다짐했다.


"일단 건강하게 둘이 서로 손 잡아주자."


더 단단히 좌경 속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기로 했다. 둘의 어우러지는 미소 속에서 살포시 포갠 손이 보인다.



<읽을, 거리>에는 김민정 시인이 지은 작가 이슬아와 시인 이훤의 결혼식 축시가 실려있다. <사랑>이라는 시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사랑을 써 내려간다.

사랑이
당신 둘에게만
늘, 자랑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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