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하신 지 거의 10년, 마지막 제자도 이제는 마흔이 넘었다. 학교 문을 닫고 나온 늙기 시작한 제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좀 센스가 없다. 눈칫밥 이 정도면 없던 센스도 짜잔 나타날 법 한데, 척하면 척하는 센스는 아무래도 성선설, 성악설 같이 본래에 몸속에 장착하고 태어나는 태센설(태어날 때부터 센스는 타고난다는 설) 정도는 될 것 같다. 웬만해선 길러지지 않는 센스 무감각 제자는 그날도 참 센스가 없었다.
거의 몇 년 만의 극장 상봉. 극장에 오셨다는 교수님의 전화를 받고 로비에서 분장실까지 부지런히 갔다. 분장실 입구에 보이질 않으셔서 아직 안 오셨구나 안도했다. 입구에서 서성이다 분장실 문이 열리는 틈에 살짝 안으로 들어갔다. 분장실 문은 요즘 웬만해선 다 막아놓는 철저한 관리 시스템으로 아파트 공동현관처럼 카드나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간다. 경비가 철저하지는 않은 터, 이럴 땐 다들 아는 방법 문 열림 때 쓱 들어가기. 때 마침 열리는 문에 일단 들어가는 건 성공. 교수님께 문은 열어드릴 수 있겠구나 뿌듯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주한 무대 뒤 분장실, 오실 때가 되셨는데 한참을 안 오신다. 전화를 걸어봐도 안 받으신다.
괜한 걱정에 한번 더 전화를 걸어본다.
신호가 한참을 가더니 복화술 정도의 나지막한 목소리 한마디 후, 재빨리 끊으신다.
"어어... 지금... 분 장 실..."
분장실 복도 제일 끝에 있는 오늘 공연 주최 교수님(교수님의 제자 = 그분도 교수님) 분장실로 재빠르게 걸었다.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 틈으로 드디어 교수님이 보인다.
오랜만에 공연장 오셔서 공연 잘 하라며 우아하게 한 말씀 하시고 싶으셨을 텐데 혼자 뒷북치며 계속 전화를 걸었다.
없던 센스를 데리고 지하로 파 들어간 얼굴은 화끈거렸다. 이 정도는 가볍게 웃어넘기는 할머니가 되신 지 오래된 터,너나랑 숨바꼭질하냐며 헛웃음을 날리신다.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거의 1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 소리에 늙은 제자는 무릎 위에 놓인 가방이 갑자기 눈에 띄었다. 무거워 보였다. 어르신을 위한답시고 가방은 제가 챙겨드리겠다 했다. 좀 센스 있는 것 같다며 어깨가 으쓱해졌다. 아까 분장실 삽질은 이제 만 회한 건가.
불이 꺼지자 스치는 한마디.
"요즘 늙어서 자꾸 기침이 나와. 그래서 물 한 병은 꼭 챙기고 다녀."
분장실에서 분명히 들었다. 어르신이 물을 챙겨 다니는 이유.어떡하지.
쉬는 시간 없이 1시간 30분 동안 움직일 수가 없다.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며 땀이 날 정도로 답답하고,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간다.
깜깜할 때 물만 던져드릴까.
바로 옆자리가 아니다. 교수님과 나 사이에는 원로 무용가 2분이 앉아계신다.
그분들에게 수건 돌리기 하자고 살짝 말을 건네볼까.
전달. 전달.
1시간쯤 지났을까. 누군가의 기침 소리가 들린다.
혹시. 설마. 아닐 거야.
애써 아니라며 다독이고 외면하는 그 와중에 옆에 앉은 유명 인사분은 자꾸 주무신다. 많이 피곤하시겠지. 따뜻하고 어둡고 음악은 잔잔하고 잠자기 딱 좋지. 잠자기의 필요충분조건 잘 알지만, 살짝살짝 코를 골며, 고개가 딸깍 딸깍 떨어질 때마다 자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깨를 내드려야 하는 건가. 받쳐드리고 싶다.
이제라도 생수병을 내밀며 전달, 전달로 잠을 깨워드릴까. 웃프다는 게 이런 건가.
불이 켜지자마자, 물부터 드렸다. 다행히 벌컥벌컥은 아니다.
공연이 끝나고 미리 예약 한 택시를 타고 가신다 하여, 배웅해 드리려 가는 길.
집 나간 센스를 만회하자. 이제 문만 열어드리면 된다.
요즘 자동차 왜 이런가요.문 손잡이를 잡을 수가 없다.
일단 누르니 손잡이가 튀어나왔다.
어랏, 너 나랑 밀당하는 거니. 내 손 끝을 만나는 순간 손잡이가 또 사라진다.
이제는 하다 하다 자동차까지 똥손을 알아보는 건가.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센스는 태생이 중요하다.
순간 교수님 또 당황하셨다. 늙은 제자 너.
기사님이 친히 내려 문을 열어주시는걸 보니 다행히 이번엔 내가 판 땅은 아니다.
떠나시는 걸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사히 호위 작전을 끝냈는데, 왠지 모르게 씁쓸하다.
교수님이 하늘 같이 높아 보이고 마냥 어려웠던 시절, 호랑이 같이 기세등등하던 그분 곁을 항상 호위무사들이 둘러싸 지키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하나 둘 떠나고 없다. 그 언제부터인가 다가가지 못할 것 같던 그분이 엄마 같고 할머니 같이 편안하다.
타고난 센스쟁이들이 대부분인 우리 과에서 굉장히 드문 둔녀. 이런 멍청한 제자를 끝까지 품어주시는 교수님 그늘 아래에서 항상 시원하게 잘 지냈다.
조교 때나 지금이나 센스 유전자는 없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닌지라 없던 감이 갑자기 딱 일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