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운전면허증을 만들 때 괜찮은 증명사진 1장을 써버렸다. 운전면허증 서류에는 2장의 사진이 필요했다. 모자란 1장은 면허시험장 한편 즉석 사진기에서 다크서클로 뒤덮인 퀭한 좀비 눈으로 찍은 사진이다. 어쩌다 만날 지 모르는 경찰한테도 내밀기 부끄러운 운전면허증 사진을 이력서에 붙일 수는 없었다.
검색창에 증명사진을 검색해 본다. 별로 멀지 않은 홍대입구역 근처 취준생 전문 증명 사진관이 눈에 띈다. 후기도 그럴싸했다. 여기가 좋겠네.
사진을 찍고 남자친구를 만났다. 나름 화장도 하고 옷도 신경 쓰고 사진을 찍는 날이니 데이트를 하기로 한 것이다. 만나자마자 사진이 궁금하다는 그에게 차마 떳떳하게 공개할 수가 없었다.
수줍게 한 장을 쓰윽 내밀었더니,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대폭소. 하... 자존심에 금이 갔다. 그래도 내 얼굴을 찍은 사진인데, 여자친구 사진인데. 내 얼굴 같지 않은 사진이지만 그래도 내 얼굴이잖아.
홍대 앞 *번 출구로 나와 찾기 쉬운 곳에 있던 그곳. 예약제로 운영한다는 그곳은 보기에도 깔끔하고 좋아 보였다. 메이크업을 고칠 수 있는 공간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이번엔 검색을 제대로 했다며 화장을 대충 고치며 거울을 한번 쓰윽 보고 커다란 조명 아래 놓인 빙글빙글 의자에 앉았다.
젊은 남자 사장님이었다. 젊은 감각을 기대해도 되겠구나 속으로 안심하며 찰칵, 찰칵 셔터를 누를 때마다 눈에 힘을 주며 사진을 찍었다.
보통은 그냥 사진을 찍고 기다리면 알아서 포토샵을 해주고 인화가 되면 찾으러 오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분은 달랐다. 하나하나 사진을 함께 보면서 원하는 수정사항이 있으면 이야기해 달라고 했다. 이런 친절한 사장님을 만난 건 행운이다. 컴퓨터 화면에 있는 내 사진들 중에 제일 괜찮은 한 장을 골랐다. 이런 세심한 사장님을 만난 건 행운이다. 찬찬히 그분의 포토샵 작업을 지켜보기로 했다.
계속 친절하게 물어본다. 원하는 곳을 고쳐주겠다고. 물어봐도 모르겠고 봐도 모르는 포토샵이다. 알아서 살짝만 해달라는 말에 알았다며 하나하나 신나게 마우스로 클릭클릭 탁탁탁.
머리는 이렇게 이렇게 잔머리를 없애고. 쫘악 탁 다다다닥.
피부는 살짝만 밝게 하고. 샤샤샥.
눈동자는 보통 이렇게 수정하고. 검정 검정 더 검정.
눈도 좀 커야겠지. 개굴개굴 동그르르.
코는 조금만 손보고. 높게 좀 더 그래도 좀 더.
얼굴 윤곽도 다듬고. 샥샥 좀 더 깎자 삭.
괜찮죠. 좀 더 할까요. 여기를 좀 더 삭삭삭. 여기도 좀 더 쉭쉭쉭. 이것도 좀 짜라라란. 여기도 있네. 슈슈슉.
뭔가 조짐이 이상하다. 살짝만 해달라 했는데, 괜찮다 했는데, 이미 사장님의 신나는 클릭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포토샵의 마법이 일어났다.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포토샵. 낯선 얼굴이다. 그냥 원래대로 해주세요라고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 정도면 너를 정말 예쁘게 만들어 주었다는 사장님의 자신만만한 웃음에 차마 뭐라고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드디어 인화 한 사진을 착착착 작두로 잘라 내민 손에는 낯선 여자의 얼굴이 들어있었다. 정말 어떡하지. 이 분이 찍은 그 수많은 증명사진으로 취업에 합격한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내 얼굴이 예쁘다는 이야기 절대 아니다. 포토샵이 필요 없는 미모라는 건 더더욱 아니다. 난 내 얼굴을 찍었는데 다른 사람 사진을 가지고 가야 한다. 현대 문명의 대표 주자 포토샵은 사람의 얼굴을 바꿔놓았다. 이런 게 페이스 오프 아닙니까. 이 사진으로 주민등록증을 만들면 어딜 가나 검문이겠지. 남의 신분증인줄 알겠지.
그래도 내 얼굴이니 남자친구에게는 보여줘도 되겠지. 예상은 했지만 대폭소의 현장을 보니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여자친구의 사진이니 한 장 가지고 가라며 굳이 지갑에 들이밀었다.
어느 날 신랑은 그 사진 좀 버리라며 그걸 아직도 가지고 있냐고 했다. 잊고 있었다. A. I. 같은 얼굴을 들여다보니 또 웃음이 난다. 이걸 어쩌자고 이력서에 붙였는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돈이 아까워서 그냥 썼지만 암만 봐도 다른 사람 사진이다.
신랑은 결혼 전에도 아버님, 어머님, 누나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을 지갑에 넣어 다녔다. 우연히 지갑의 가족사진을 언뜻 본 엄마는 사진을 자세히 보고 싶어 보여달라고 했다. 그때, 가족사진 뒤에 따라 나온 증명사진이 툭 떨어졌다. 엄마의 얼굴색이 순간 변했다. 신랑은 당황해서 얼른 외쳤다.
"어머님! 이 사진 선희예요!"
그 사진은 친딸이 맞습니다. 사위가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아직도 지갑에 사진을 넣고 다닌다며 순간 당황하신 장모님. 딸 얼굴도 못 알아볼 정도로 포토샵을 해놓은 포토샵 부심 있던 사장님 이제 어쩌실 겁니까. 모녀 사이를 갈라놓은 엄청난 포토샵의 위력을 보았는가. 그 얼굴은 나만 못 알아본 게 아니었다.
기술이 좋아졌고, 조금 고칠 수도 있지. 예쁘면 더 좋겠지. 사장님만의 포토샵 그 살짝의 기준이 있었으리라. 그 조금의 기준으로 인한 오해일지라도 페이스 오프는 심했다. 카톡 프로필 사진 보고 전화 통화까지 하다가 소개팅 자리에서 만났을 때 인사만 하고 돌아갈 사진이다.
못 나도 내 얼굴이 좋다. 튀어나온 눈도 안경을 이제는 끼지 않으니 불편하지 않고, 서양인스럽지 않은 코도 좋다. 교정을 해도 변하지 않는 큰 앞니 일명 토끼 이빨은 앞니가 크면 큰 집에서 살 팔자라는 친구의 말에 은근 기대감이 생기면서 콤플렉스가 사라졌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지는 않지만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리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사랑한다.
이제 더 이상 포토샵은 없다. 나만의 얼굴은 유일한 존재이다. 나는 나를 끝까지 사랑해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