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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먹갈기 좋은날 Sep 24. 2021

시대의 어머니, 나는 어떤 '엄마'가 될 것인가

-  '나'를 잃지 않고 엄마가 되기위하여

 시대의 어머니맹자의 엄마가 될 것인가, 한석봉의 엄마가 될 것인가, 아니면 율곡이이의 엄마 '신사임당'이 될 것인가.         

  

    최근 필자가 시댁에 다녀오며 그 곳에 새로 설립된 문화센터에 발길할 일이 있었다. 지역의 특별한 이야기라 하여 지역 출신 예술가의 호를 딴 문화센터를 설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일대기와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비록 출생이 촌이었지만 유명 대학의 미술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일찍부터 일본으로 건너가 예술을 공부했던 수재였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회화사적 평론은 필자에겐 어려운 이야기이니 전문 비평가들에게 넘기도록 하고, 회화를 전공한 후학으로서 그리고 지금도 작업에 임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그림에 대한 철학에는 깊이 감응했다. “우물 안에 있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작가 자신의 심지를 잃어서도 안 된다.”는 그의 철학인데 작가는 자신의 세계관을 관철해 주관적으로 작업에 임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시대를 읽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필자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웠던 부분이 있었다.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문단이었는데, 그는 어머니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어머니, ○○이었다. 아버지 이름은 또박또박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데, 어머니는 왜 이름을 적지 않았을까. 어머니의 개인정보라서라고 밝히지 않는 것이 도리인 것 같아서 였을까. 작가는 이미 작고하셨기에 여쭤볼 길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어머니의 “자연의 작은 생명도 소중히 하라”는 가르침이 자신의 작품 철학에 고스란히 담겼다고 회고하며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했다. 그런데 어째서 어머니의 성함을 적지 못했을까. 어머니가 말씀을 안 해주셨기에 그랬을까. 어머니 스스로도 자신을 지우고 가족을 위해 희생의 삶을 사셨기에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일까. 누군가의 어머니로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지워야 하는 숙명을 가졌던 과거의 어머니 상은 이제 버려야 할 문화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네 어머니들이 그렇게 우리들을 사회로 진출시킨 것이다. 자신이 마지막 희생이길 바라면서 말이다. 

    이 시점에 돌아봐야 할 과거의 여인 몇 명이 있다. 5만원권의 상징,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 떡 썰기와 글씨 쓰기 대결의 일화를 남긴 한석봉의 어머니, 아이를 위해 3번이나 거처를 옮겼다는 맹자의 어머니다. 

     모두 자식을 훌륭하게 키웠다는 점에서 상시 거론되는데 더욱이 신사임당은 그녀 스스로의 재능마저도 출중하여 위인전에는 항상 그녀가 포함되어있고 그녀의 그림과 여성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물론 율곡이이가 회고한 어머니에 대한 기록이 있어 신사임당의 이야기는 더 자세히 전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알려진 신사임당인데, 사실 자세히 알아보면 신사임당은 현모는 맞았을지 모르지만 양처는 아니었다고 한다. 결혼 후에도 그 유교와 선비의 나라 조선사회에서 아이를 가지기 전까지 친정에서 머물렀다하니, 여간내기가 아니었을 것 같다. 물론 신사임당이 명문가 출신이었던 것이 작용했을 것이다. 신사임당의 남편은 이원수(1501~1561)로 벼슬길에 오르기가 ‘하늘에 별따기’로 낙방을 밥먹듯이 했다고 한다. 종국에는 벼슬길에 올랐지만 이도 연줄이었다고 하니, 여성의 몸으로 벼슬을 하지 못했지만 그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았던 신사임당이 여성만 아니었으면 벼슬을 몇 번이고 했을 것 이라는 후대의 평가를 보면 남편의 자격지심이 보통 아니었을 것 같다. 그렇기에 사임당의 자식들이 어머니를 보고 배운 그대로 성장했기에 훌륭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남편의 입장에서 율곡 이이가 신사임당의 자식으로만 알려지고 이이마저도 어머니를 더 섬겼다고 하니 안타깝지만 말이다. 

     한석봉의 어머니는 떡 썰기와 글씨쓰기 대결을 통해 아들을 깨우치게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한석봉의 어머니가 석봉에게 10년간 글씨공부를 하라고 절로 보냈는데 3년 만에 돌아와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더 글씨를 공부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아들을 향해 불을 끄고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씨를 쓰거라.’ 라고 했으며 그 결과는 석봉의 참패였다는 일화다. 

   “불을 껐는데도 가지런히 썰린 떡이었다.”는 묘사는 그녀의 기술이 가진 경지가 어땠는지를 알려주는 문장이다. 또한 아들에게 스스로 모범이 되어 그를 깨우치게 했으니 이 역시도 참으로 지혜로운 ‘육아관’이었다. 

     오래 전부터 훌륭한 엄마는 맹자의 어머니였다. 자식을 위해 3번이나 거처를 옮길 정도의 열정을 보인 엄마의 모습은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을 만들었을 정도로 자녀의 교육관에 대한 철저한 고증이다. 또한 최근 방영되었던 JTBC의 <SKY캐슬>(2018)이나 SBS의  <강남엄마 따라잡기>(2007)는 자녀의 교육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이외에도 자녀의 교육에 관한 문제를 다룬 드라마는 많다. 며칠 전 종영한 SBS의 <펜트하우스>(2021)는 상류사회의 이면을 처절하게 그려냈고 교육과 집값의 1번지이 그 곳의 막장스토리가 이슈화되면서 시즌 3까지 제작되었다. 개연성 없는 스토리라인, 살인과 치정, 복수 등 수많은 논란을 불어 일으켰지만 시즌3까지 간 것을 보면 시청자들의 어딘가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준 것은 분명하다. 

    이런 드라마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봐도 우리나라는 교육에 대한 열의가 다른 나라보다 월등히 높다. 나라가 가진 것이 인재밖에 없어서라는 자조어린 관점도 있고 교육이 백년지대계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을 대변한다. 그러나 지나친 학벌위주의 사회, 교육열은 아이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맹자의 엄마처럼 아이를 위해 이사까지 다니며 교육환경을 바꿔 줄 수 있는 길도 어려워진 실정이다. 그러니 <펜트하우스>처럼 그들만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구분 짓고 그들만의 이야기라는 틀 안에서 그려진다. 드라마 속에서나마 상류사회의 천태만상이라고 시청자를 위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교육환경을 위해 이사를 할 노력의 길은 막혀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들은 여전히 아이의 교육에 진심이다. 그 안에 아이가 어떤 친구와 놀고 있고 다른 친구들은 어떤 학원을 다니는지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실상 맹자의 엄마보다 더 힘들어진 현실이다. 하지만 말이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다. 이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아이 앞에서는 찬물도 함부로 마시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를 이해해주고 아이와 공감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는 언제나 부모와의 대화를 갈구한다. 다만 사춘기를 지나고 성인이 되어가면서 그 요구가 부끄러워지고 어색해지고 부모 자체도 자식을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세대가 되어가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 했던 신사임당과 한석봉의 어머니는 그런 면에서 아이의 거울이 되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녀들이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고, 어떤 조건에서 아이를 키웠는지 외부환경을 차치하고 아이와 엄마의 관계만 놓고 보았을 때 말이다. 귀감이 되었기 때문에 아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여기에 아이와 대화하고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필자에게도 아이와 공감하고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 큰 숙제지만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이다.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는 엄마가 행복해야 한다는 것도 비단 엄마의 자존감 회복을 위하기뿐 아니라 엄마와 아이 사이에 연결되어야 할 관계의 기제를 지적한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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