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nfonia Jul 21. 2022

완전한 세계가 무너지는 법

외국인이라는 것, 유럽에서 아시안으로 산다는 것

2018.8.4


이십 대 나의 세계는 공고했다. 나는 씨네큐브에서 영화를 보았고, 영국 밴드 음악을 들었고, 혼자 미술관에 갔고, 자기 계발서는 절대 읽지 않았다. 친구들 연락에 꽤 쿨한 척했고 남자친구쯤 없어도 덤덤하게 지냈다. 오히려 누군가의 연락이 귀찮았다. 자유분방하고 누구에게도 의존적이지 않은 내가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나는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다'라는 의식에 사로잡혀 이상적 자아의 껍데기를 만드는 데 20대를 보냈다.


홍대병 말기 환자였던 나. 핀란드에 와서 아주 가볍게 고쳤다.


이십 대 후반 무렵, 나는 다른 세계로 왔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진 육체만으로도 나는 특이한 존재가 되었다. 오슬로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낼 당시 단체 사진 속 나는 백구들 사이에 낀 점박이 누렁이 강아지 같았다. 유럽에서 온 친구들이 그들의 주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할 때면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들의 문화를 '배워야' 하는 입장이었다. 아시안을 좋아한다는 친구들은 인간인 나보다 한국이라는 국적에 관심이 많았다. 좋아하지도 않는 한국 로맨스 드라마 이야기를 했다.


말로서 글로서 나를 설명하길 좋아했지만 언제부턴가 말을 잃었다. 그나마 할 줄 아는 영어는 지적 허세를 드러내기엔 부족한 수준이다. 그 조차도 딱히 뽐낼 일이 없다. 내가 습득한 지적 산물 중 '한국산'은 인정받기 힘들기 때문이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를 읽지 않았다고 할 때마다 그들로부터 의심이 가득한 눈길을 받아야 했다. 나는 반지의 제왕보다 김승옥의 소설을 좋아했는데 말이다. 항상 내가 왜 다른 사람인지에 대해 원초적으로 밝혀야 했다.  


추운 날 따뜻한 국물이 있는 국수가 먹고 싶을 때도, 학식에 나온 샐러드를 살기 위해서 먹을 때도, 나는 설명해야 했다. 한국에서는 샐러드보다 익힌 채소를 먹고 겨울엔 따뜻한 국물을 먹는다고 덧붙여야 했다. 고결한 취향에 도달하기엔 그전에 거쳐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내가 가장 최근에 영화관에서 본 영화는 킹스맨이다. 영어라도 플롯이 복잡하면 알아듣기 힘들기 때문에 폭발물이 빵빵 터지는 영화로 골랐다. 한국에서 각종 음악 페스티벌에 다녔으나 메탈이 지배적인 이 땅에서 내가 만족할 만한 음악 클럽 조차 찾기 힘들다. 또한 교보문고에 툭하면 가서 항상 새로운 책을 확인하고 읽어봤지만 여기선 그럴 수 없다. 핀어를 모르므로 모든 문화적인 혜택에서 주변인이다.


나를 설명한다고 믿었던 언어와 취향은 핀란드에서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피상적인  모습을 설명하기에 급급해서 세련된 취향 같은 것은 이미 잊어버렸다.  나를  차원 다른 세상에 옮기자, 나의 세계를 설명했던 가치관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대신 인간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 나는 애정을 주면 나의 중심축도 흔들린다고 믿었다. 공고한 나의 세계를 누군가 무너뜨리는  두려웠다. 상처받지 않을 거야, 상처 주지도 않을 거야. 내가 이십  초반에 되뇐 말이었다. 모두가 사랑을 쉽게 나누던  시절에, 역설적으로 나는  누구와도 진득한 관계를 가지지 못했다. 누군가가  세계의 문을 두드리는 순간, 도망가 버렸다. 그리고 나의 완전한 세계를 이해할  있는 사람은  미래에서 걸어오는 중이라고 믿었다.


2019 피스카스 비엔날레에서. 텅 빈 공간이 내 마음 같았다.


핀란드의 겨울을 두 번 나고 나니 완전한 세계의 파편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생각보다 의존적이었다. 애정을 한 번 주면 내가 홀로 품을 수 없을 만큼 커지는 것이 두렵다. 한국에서는 애정을 주는 일 조차 어려웠다면, 이곳에서는 애정을 쉽게 주고 쉽게 실망한다. 말이 조금이라도 통할라 치면 그 사람과 무섭게도 거리를 좁히고 싶다.


나는 판문점 같은 관계를 좋아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정한 거리와 그 안에 만날 수 있는 공동의 공간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복잡한 과정은 생략하고 싶다. 나에게 상대방이 확신을 주었으면 한다. 내가 떠날라치면 붙잡아주었으면 좋겠다. 나의 결정권은 이미 두 번째가 되었다. 당신이 잡아주고 당신이 결정해주고 당신이 나의 외로움은 아무것이 아니라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는 것이다.


나는 선택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러나 언어와 취향을 잃고   마지막 남은 인간은  세계를 지탱할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선택하는 사람이  수가 없다. 이미 외로움만으로도 지는 게임이다. 내가 한국에서 그랬듯 여전히 완전한 세계에 사는 핀란드인이 나의 외로움을 이해할 수도, 가늠할 수조차 없다. 그들은 사랑하고자 누군가를 선택하겠지만, 나는 살기 위해 누군가에게 선택 당해야 . 타국에서 살아낸다는 것은  외로움을 이겨낸다는 말이다.


서른이 훌쩍 넘어가기 전에 나의 여러 파편을 발견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도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본 것 같았다. 새로운 세상이 궁금해서 이곳까지 왔지만 내 안의 세계를 탐험하는 데 시간을 소요하고 말았다.


여전히 나는 분열하고 있다. 조각마다 서로 다른 내가 다른 말을 한다. 외롭지 않느냐고 누구라도 만나라고 서두르는가 하면, 너 세계를 온전히 지켜내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기 위한 대가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영원한 세계는 내 안에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 교훈을 낯선 땅에서 배우고 있을 뿐이다.

이전 08화 그 남자의 사랑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