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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nfonia Sep 28. 2022

어느 대륙이나 유학생은 외롭다

핀란드에 있는 나만 힘든 건 아니었다

2018. 7.3


지난 유월 한 달 동안 파리와 로마로 가족여행을 갔다. 엄마, 아빠, 작년에 결혼한 오빠와 새언니가 함께한 여행이었다. 서울부터 장장 10시간이 넘는 시간을 건너온 가족을 파리에서 만났다. 여정은 헬싱키와 탈린 그리고 마지막 로마까지 약 2주 동안 이어졌다.


나는 '본투비 집수니'라 여행을 1주 이상만 해도 집에 가서 쉬고 싶어 한다. 그러나 로마에서 마지막 날, 중요한 사실을 알았다. 헬싱키는 '우리 집'이 아니었다. 눈만 마주쳐도 낯선 이에게 'Ciao Bella!(차오 벨라)'를 외치며 미소 짓는 사람들,  1.5 유로면 마실 수 있는 카푸치노, 습한 바람, 꽃 냄새, 매일 먹어도 새로운 젤라또,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나무와 또 나무밖에 없는 핀란드로 가야 했다. 1.5유로로 작은 젤리 한 봉지 하나 살 수 있고, 모르는 사람과 눈을 마주칠 일이 없고, 꽃보다는 날카로운 자작나무가 가득하고, 여름에도 건조하고 찬 바람이 부는 그곳. 다행히 추워서 젤라또가 딱히 생각나지 않는 곳. 로마에서 비행기를 타고 3시간 정도 가자 구름 아래로 무성한 숲이 보였다. 핀란드에 도착한 것이다.


이탈리아 여행 중 아침 식사. 카푸치노는 감동이었다.


나는 다시 빈 공간으로 왔다. 집이 아니라 내가 잠시 떠나고 남았던 공간으로 돌아왔다. 내 존재의 임무는 빈 공간을 채우는 것 밖에 없었다. 가야 할 자리로 간 것뿐이다. 내가 끼워져야 이어지는 삶이다. 그 자리로 돌아가서 이방인이자 외국인으로서 임무만 다하면 되는 것이다.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도 당분간 없었고 학교 수업은 끝났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열흘을 보냈다. 나의 가장 큰 적은 무기력이다. 그리고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다. 보통 두 가지 증상은 우울할 때 같이 온다. 누워서 유튜브를 열 시간씩 보았다.


가끔은 한국 친구들을 만나 신나게 핀란드를 씹었다. 나와 같은 시기에 유학을 온 한국 친구들은 비슷한 불평을 했다. '외로워서 죽겠다'는 우리가 합의한 적 없는 공통된 주제였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나라를 잘못 골랐다고 말했다.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사람 사귀는 일이 힘든 적 없었다는 외향적인 사람조차 핀란드인은 사귀기 너무 어렵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적어도 미국 같은 나라에 갔으면 친구 사귀기 수월했을 것이라 입 모아 말했다.


이런 대화를 엿듣기라도 한 듯 유튜브는 유학생활에 관한 조언을 담은 영상을 여럿 추천했다. 하나는 미국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한 청년이었고, 다른 하나는 캐나다 밴쿠버에 이민을 간 부부였다. 두 채널에서도 우리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스크롤을 쭉 내려 댓글을 보니 영미권은 물론 각각 다른 나라에서 유학하고 있는 사람들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등 대륙 별로 여러 지역이 있었는데, 고민은 같았다. 적응하기 어렵고 현지 친구를 사귀기 매우 힘들며 외로워 죽을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중 단언 압권은 분노에 차서 써 내려간 것 같은 위의 댓글이었다. 눈이 11월에서 4월 말까지 오고, 거지같이 잘라 놓은 헤어컷이 15만 원, 연어 밖에 없고 매일 그것만 먹어야 함, 할 것 '졸X' 없는 나라. 노르웨이에 대한 평은 혹독했다.


나도 오슬로에 잠깐 살아봤지만 길거리에서 이민자 또는 동양인을 훨씬 많이 보았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세븐일레븐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은 터번을 쓰고 있었다. 헬싱키 시내에서 거의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이민자가 운영하는 다양한 가게도 많았다. 외국인이 살기에 편할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연어 외에도 다양한 해산물을 슈퍼에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도 헬싱키보다 금요일 밤 시내에 역동적인 바이브(...랄까) 비슷한 걸 느끼긴 했다는 것이다. 그때 친구의 생일파티에서 꽤 신이 나서 그랬나? 아니면 노르웨이 친구가 코트 안주머니에서 힙플라스크(휴대용 술병)에 담긴 보드카를 꺼내 한 모금 건넸기 때문이었을까?


분노에 서린 댓글을 읽으며 상심에 가득 찬 지난 열흘을 떠올렸다. 이토록 아름다운 이 땅에 정을 붙일 구석을 찾을 수 없다니. 믿을 수 없었다. 코 끝이 시원한 숲 속 바람, 겨울의 어둠을 벗은 노란색 건물들, 밤까지 빛으로 찰랑대는 수면, 파란색과 초록색이 수채화처럼 만나는 하늘, 짠기 없이 건조한 모래 맛이 나는 바닷속, 한참을 걸어도 해가 지지 않는 나날들. 그 가운데에 곧 끝날 여름을 생각하는 내가 있었다. 몇 개월 후면 떠나보낼 시간을 바라봤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가장 어두운 밤을 생각했다. 핀란드에 와서 생긴 습관이었다.


하카니에미 근처였나. 아름다운 여름은 건조한 핀란드인도 말랑하게 만든다. (*아이폰을 하도 떨어뜨려서 렌즈에 구멍이 났다)


하루 종일 빛이 드는 땅에 누워있는 사람들과 빈 구석을 어김없이 메운 초록 잎사귀들이 벽에 걸린 그림 같았다. 나는 그 그림에 없었다. 나와 현지인의 삶이 완벽하게 분리되는 시점이었다. 외로움이 뼛속까지 시린 겨울보다 아름다움이 창창하게 펼쳐지는 여름에 나의 사소한 지위를 확인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떠나면 보지 않을 풍경과 보내지 못할 시간들을 외로움에 허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8년 전에 혼자 파리와 로마로 배낭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당시에 파리에 일주일이나 있었는데도 파리 시내 대부분의 화장실이 그토록 지저분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또한 로마의 사람들이 딱히 친절하다는 인상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헬싱키에서 약 2년을 살고 난 후, 파리와 로마를 가니 내 세포의 약 1/100은 헬싱키를 기억하고 말하고 있었다. 핀란드에서 지저분한 화장실은 찾기 힘든데, 파리에 가니 반대였다. 오를리 공항 화장실에서부터 내 세포는 핀란드 화장실의 청결함을 찾고 있었다. 로마에 가니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일이 당황스러웠다. 핀란드에서 자란 세포에는 '모르는 이에게 웃지 말 것'이라는 새로운 조항이 입력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몇 번 그룹 워크를 같이 한 핀란드인에게 웃으며 친한 척을 했다가 그의 차분하고 흔들림 없는 표정에 당황한 적이 있었다. 웃으며 인사를 한 내 모습에 그는 더 당황했으리라.


내가 이 땅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과 상관없이 나의 세포는 어떻게 해서든 핀란드를 기억하고 있다. 여전히 핀란드는 낯설다. 다가올 겨울과 어둠은 감내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논문이 끝난 이후 미래는 솔직히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다. 핀란드는 불행하게도 내 인생 혼돈의 시기에 끼인 운명이다. 매일 카푸치노에 감동했던 이탈리아도 이 시기에 나의 운명과 엮였더라면 절대 행복할 수 없는 땅이 되었을 것이다. 핀란드의 탓도 내 탓도 아니오. 게으르고 무책임한 나는 운명에 책임을 지우기로 했다. 앞으로 할 일, 할 수 있는 일에만 매달리기로 했다. 내가 진 외로움과 혼돈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만 걸어가기로 했다.



올 초에 오은영 박사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태국 남자와 결혼 후 태국에 살고 있는 연예인 신주아가 나왔다. 그녀의 고민은 '결혼 후 외롭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고민을 유심히 듣고 있던 오은영 박사가 한 마디를 했다.


"그런데 말이죠~ (이 말이 나오면 집중해야 할 타임) 신주아 씨에게 여전히 우리 집은 한국인가 보네요. 8년이나 살았는데 태국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집'이라고 말하진 않네요"


과연 오은영 박사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단 말인가. 그 대목에서 한국에서 헬싱키로, 또는 다른 나라에서 다시 헬싱키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타고 있던 나를 보았다. 우리 집이 아니라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나였다. 여전히 나에게 '우리 집'은 대한민국 서울시의 평범한 베드타운에 위치한 낡고 오래된 아파트였다. 그곳에는 자작나무가 가득한 숲도 바다 앞 산책로도 없었다. 대신 매연을 먹은 은행나무와 아파트 앞 차도를 따라 걸어야 하는 좁은 인도가 있었다.


태국에서 궁전 같은 집에 살고 있다는 그녀에게도 '우리 집'은 부유한 그곳이 될 수 없었나 보다. 오은영 박사는 그녀에게 집 밖을 나가서 태국 문화 속으로 뛰어들라는 처방을 내렸다. 일대일 태국어 과외를 받기보다는 직접 사람을 만나서 태국어를 배우라고 조언했다. 오은영 박사의 처방은 정확했다.


대부분의 유학생은 비슷한 감정 회로를 밟는다. 새로운 문화가 주는 흥미가 사라지고 그 세계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나면 외로움이 남는다. 한국인 친구도 대신할 수 없는 빈 공간이 생긴다. 그 단계에 현지 사람을 통해서 현지 사회에 서서히 젖어들 기회를 잡는다면 다행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여전히 한국에 있는 우리 집과 내가 살고 있을 뿐인 집 사이의 머나먼 거리만을 재보게 된다. 방구석에서 홀로 외로움을 독식하면서 말이다.


나와 같은 시기에 유학생활을 시작한 친구들 모두 여전히 핀란드에 있다. 돌아온 사람은 나뿐이다. 이미 결말은 명확했다. 핀란드를 떠나는 순간까지도 이제는 핀란드가  같다고 하는 친구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외로움과 맞바꾼 자유로움도 저만치 묻어두고 우리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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