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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nfonia Mar 13. 2022

핀란드 교수들의 그뤠잇

한국식 교육에 최적화된 벼락치기형 인간의 핀란드 교육 체험기

나는 데드라인이 없으면 공부를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과제를 미리 시작한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는 걱정이라도 일찍 했다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땐 시험을 앞두고 벼락치기를 하는 긴장감을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다. 벼락치기를 하는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두 가지의 자아가 타협한 결과이다. 하나는 게으르고 욜로(YOLO) 마인드를 가진 유유자적한 자아, 다른 하나는 사회에서 인정해주는 권위를 놓치고 싶지 않은 자아. 게으른 자아는 내일로 미루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럼에도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자아는 밤을 새워서라도 해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벼락치기를 했다. 이런 나도 외국에서 공부한다면 조금 더 느긋한 분위기에서 남들의 인정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자율적으로 학습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핀란드에서 공부를 하고 보니 나는 한국 교육에 최적화된 인간이었다. 결과가 중요한 한국 교육에서 중간 과정에 불성실했으나 벼락치기엔 능해서 성적은 그럭저럭 냈으니 말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내내 익힌 학습의 형태는 매번 시험에 드는 것이었다. 내일까지 수치화된 기준만큼 성적을 내야 한다. 시험을 보러 들어가면 이미 시험 대형으로 맞춰진 의자에 앉은 반 친구들이 엄숙한 분위기에 찌그러져 있다. 번호 순서대로 줄과 열을 맞춰 앉은 친구들은 두 가지로 나뉜다. 이미 포기한 자와 포기할 수 없는 자. 지난 새벽에 간신히 집어넣은 교과서 내용이 한 글자라도 쏟아질까봐 나는 친구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과 동급생이 인정해주는 권위를 포기할 수 없는 자였다. 


한국 교육은 나를 시험에 들게 하고 선생님이 나를 숫자로 판단하게 한다. 이번 중간고사에선 몇 등을 할까 내가 잘했을까 못했을까. 내가 유지하던 성적은 내야 한다는 압박감. 무엇보다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서 한량이 기질인데도 벼락치기를 해서 우등생의 껍데기라도 쓰고 살았다는 것. 그런 압박감에 공부했고, 그것이 내가 성적을 내는 원천이었다. 한국 교육이 날 성장하게 한 방식이었다.


항상 동그랗게 둘러앉아 토론을 하는 시간이 있었다


핀란드에 오니 데드라인도 무용지물이었다. 그까짓 거 넘겨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 없었다. 과제를 내고 공부를 하는 모든 과정의 주인은 나였다. 타인으로부터 과제에 대한 평가와 그에 따른 가치 판단을 받기가 무척 어려웠다. 교수님들의 태도는 언제나 중립적이었다. 어쩌다 흥미로운 주제라서 집요하게 조사해서 에세이를 냈더니 돌아오는 피드백은 나 포함해 모든 애들에게 비슷한 대답이었다.


Great! 

그뤠잇!


우리 과가 연계된 덴마크 학교에 있는 한 교수는 '수펍'(Superb- 최고의, 최상의)이란 단어를 달고 살았다. 덴마크 교수는 학생이 발표 하나만 끝내도, 토론 시간에 조금이라도 재밌는 의견을 내도 '수펍'을 외쳤다. 오죽하면 우리 과에서 최대의 유행어는 그녀의 덴마크 억양이 가미된 '수펍'이었다. 마찬가지로 핀란드 교수님들에게 꼭 집어서 아주 명확한 칭찬을 듣기는 낙제점을 받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수우미양가와 100점 단위의 점수 환산에 익숙한 나로서는 일률적으로 맞춰진 것 같은 피드백이 맘에 들지 않았다.  


한 번은 어려운 텍스트를 읽고 제출한 과제에서 내가 텍스트를 잘못된 방향으로 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 대한 교수의 피드백은 다음과 같았다. "이건 내 생각인데 이렇게 해석하는 편이 맞지 않을까?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야" 나는 그 문장을 두어 번 읽고 나서야 속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그냥 틀렸다고 말하지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하도 옳고 그름 사이의 가치 판단을 초등학교 때부터 훈련해온 탓에 '네 말도 맞고 얘 말도 맞다'와 같은 양비론적인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핀란드 교육에 대해 온갖 찬사가 많다. 물론 나도 핀란드 교실에서 느긋한 분위기를 마음껏 즐겼다. 우리 과 헤드 교수는 학교는 마음껏 실수하는 곳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핀란드에 있었으면 수학을 좀 잘했을까. 결과를 매번 눈으로 확인하는 학교에서 수학 점수만 보고 나면 쭈구리가 된 기분이 들었다. 매번 시험 볼 때마다 들어야 했던 말이 시험을 보는 내내 귓속에 맴돌았다. "애들아 이번엔 절대 실수하지 말아라" 그때나 지금이나 덤벙거리는 성격이어서 기껏 다 풀어놓고 사칙연산을 틀려서 12살 먹은 난 수학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구몬수학으로 100개씩 사칙연산을 훈련해도 틀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핀란드처럼 괜찮다 괜찮다 했으면 난 수학을 좀 더 좋아했을까? 아니 계산이라도 덜 틀렸을랑가?


유일하게 엄격했던 노르웨이 학교의 교수님 크리스틴. 5장 분량의 에세이를 발표하는 날이었다. 그녀는 타이머까지 들고 와서 시간을 쟀고 근거를 빼먹으면 바로 지적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핀란드 교육에 의문을 가진다. '좋다 괜찮다 잘했다'라는 방법으로 학생이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실제로 나는 석사 논문을 제출하기 위해 담당 교수를 2주에 한 번씩 만나 피드백을 받았는데, 그녀는 칭찬밖에 늘어놓지 않았다. 혹시 내가 이 부분이 부족하지 않을까 말을 해도, 그녀는 'enough', 충분하다고 말했다. 혹은 넌지시 돌려서 말했다. "네가 더 부족하다고 느껴서 보충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라며. 안일했던 나는 완성도 높은 논문을 제출하고자 하는 마음보다 그녀의 느긋한 피드백에 의지를 했다. 그녀는 나를 빨리 졸업시키고 싶어 했다. 그녀는 그 정도면 나의 논문은 졸업하기에 적당하므로 그에 맞는 피드백을 주었을 것이다. (*핀란드 교육의 문제점이 여기에 있다. 핀란드 교육은 자국민에게 석사까지 무상이라서 대다수의 핀란드 학생들은 졸업을 빨리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핀란드 교수들에게 학생을 졸업시키는 것은 성과 중의 하나이다. 수당을 받는다고도 들었으나 이는 확실치 않다.)


논문은 어디까지나 나의 결과물이다. 설사 교수가 좋은 피드백을 주었더라도 내가 스스로 의심이 든다면 그 의심을 노력으로 메꾸면 된다. 그러나 나는 게을렀고 안일했다. 내가 여태까지 익숙하게 한 결정을 선택했다. 타인이 인정해주었으니 된 것이다. 나는 스스로의 의심을 접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소 짧은 기간 안에 한 숨 돌릴 여유도 없이 논문을 완성했다. 그렇게 완성된 논문엔 당연히 허점이 많았다. 내가 스스로 가졌던 의문과 문제점을 논문 심사에서 들었다. 결국 나는 평이한 점수를 받았다. 나의 담당 교수가 나를 조금 더 궁지로 몰고 갔더라면, 그녀가 이 정도로는 안된다라고 말했더라면! 이 말을 나는 몇 번이고 되뇌었다. 나는 그녀를 탓하는 방법으로 평이한 점수를 잊고 싶었다. 

 

핀란드 교육은 "괜찮아, 사랑이야"라고 말한다. 한국 교육은 "괜찮아? 이게 괜찮냐고" 말한다. 나는 두 사이의 합의점을 찾고 싶다. "괜찮아 사랑이야"라고 말하는 핀란드 교육에선 안분지족의 마인드를 배울 수 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해야 하는 한국 교육은 마치 올림픽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것만 같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전자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전인적인 교육이 걸맞고, 후자는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엘리트 중심의 교육이 적합하다. 그렇다면 나의 지향점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욕심내지 않고 안분지족의 마인드로 살기인가 올림픽의 정신으로 금메달이라도 목에 걸어야 만족하는가. 둘 사이에서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으므로 나는 핀란드 교육도 한국 교육도 어느 것이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 다만, 핀란드 교육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사를 거두기로 했다.  



 

다큐멘터리 '한계상황(Over the Limit)'

최근에 EIDF(EBS 국제 다큐영화제)에 출품되었던 '한계상황'이라는 다큐멘터리의 일부분을 짧은 클립으로 접했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어린 러시아 체조 선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짧은 클립 안에서 코치들이 그녀에게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언어를 퍼붓고 말 그대로 '한계상황'으로 몰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극복하고 이 영화의 원제인 'Over the Limit'이라는 말에 걸맞게 금메달을 땄다. 짧은 영상을 보고 13살의 내가 떠올랐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나의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나는 선생님이 그려준 사과 10개를 놓치지 않고 다 채워서 연습을 했다. 엄마한테 피아노를 사달라고 노래를 했고, 피아노가 생겼을 때 너무 좋아서 학교에 가기 전에 새벽에 일어나서 피아노를 쳤다. 


5학년이 되었을 무렵 내가 다니던 신생 피아노 학원의 원장 선생님은 꽤 열정적이었다. 학원을 키우기 위해 예중 입시를 할만한 친구를 골랐다. 그녀의 레이더망에 내가 선택되었다. 나는 5학년 말쯤부터 갑작스레 예중 입시를 위한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예중 입시를 준비한 지 3개월 만에 고꾸라졌다. 새벽에 일어나서 피아노를 칠만큼 피아노를 좋아했던 나는 피아노를 두 번 다시 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예중 입시 레슨을 담당했던 선생님은 나보고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손가락을 잡는 모양부터 손목과 팔목을 쓰는 자세부터 잘못되었다며 하루에 최소 6시간은 피아노 연습을 하라고 했다. 그녀의 혹독한 말에 나는 매일 울면서 레슨을 마쳤다. 3개월 만에 나는 대단한 음악적 재능이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사실 나는 노력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17살의 러시아 체조선수 소녀처럼 그 말을 듣고 이겨내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올림픽의 정신을 계승하기에 나의 의지는 나약했다. 재능이라는 마법 같은 단어에 모든 것을 걸고 싶었다.   


여러 번 진로를 바꿀 때마다 13살의 나를 떠올렸다. 그때 차라리 예중 입시를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내가 '재능'이 있다고 착각하고 계속해서 열심히 피아노를 쳤더라면? (물론 그 이후 17살까지 취미로 피아노를 계속 배우긴 했다) 그때 만난 입시 선생님이 차라리 나를 어느 정도 포기하고 혹독한 말을 거두었다면? 그렇다면 나는 음악가, 아티스트에 대한 꿈을 다음 생으로 미룰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노력하지 않은 자의 변명일뿐이다. 


핀란드에서 트럼펫을 공부하는 한국인 친구에게 이 일화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내 말을 듣더니 이런 말을 건넸다. 


"누나, 흥미를 보이고 노력을 하는 것도 재능이야. 한국에서는 재능의 기준이 너무 높고 범주가 좁아서 그래. 여기 오니깐 음악을 하다가도 다른 길로 가는 사람도 있고 자유롭더라"


생각해 보니 내가 기준으로 잡았던 재능의 수준은 조성진, 손열음 급이었다. 5살 때부터 범상치 않은 실력으로 바로 눈에 뜨이고 이미 10살 즈음엔 영재교육원에 들어가 있는 수순 말이다. 물론 조성진과 손열음이 재능만 믿고 그 자리에 올라갔을까. 노력도 세계적인 수준으로 했을 것이다. 


한 번은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유엑스 디자이너로 핀란드 회사에서 일하는 한국인 친구의 개발자 동료 중에 스노우보드인지 어떤 겨울 스포츠 종목으로 올림픽에 나가본 사람이 있다고 말이다. 한 명이 아니었단다. 그래서 친구는 우스갯소리로 이 회사 뭐하는 곳이야?라고 물었단다. 한국처럼 이미 13살에 예술과 비예술,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교육 시스템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이다. 모두가 조성진과 손열음이 될 수 없다. 조성진과 손열음이 되지 않더라도 행복할 길은 많다. 특히 나처럼 한계상황을 넘어가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에겐 우회해서 갈 수 있는 길도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핀란드 교육이 좋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한동안 치지 않았던 피아노 뚜껑이나 열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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