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싱키의 육체노동자로 살았던 6개월을 회고하다
한국에서 내가 해본 아르바이트는 과외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여러 개를 하지 않았다. 딱 내 용돈벌이만큼만 했다. 과외 시장에선 시간당 최소 20,000원의 대가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시간당 최저임금은 4,000원대 였으니 커피숍이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고려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취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비를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감사하게도 대학교 등록금은 부모님이 해결해주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부르주아가 따로 없었다. 집안이 항상 여유롭진 않았지만 생존의 전선에 뛰어들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 적은 없었다. 또한 그 아르바이트가 육체적 노동이 된 적도 없었다.
핀란드에 오자 고고한 부르주아로 살 수가 없었다. 학비는 없었지만(*2017년 이전 입학생은 학비를 내지 않았다) 생활비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과 친구가 일했던 미국식 바비큐 레스토랑에서 서머잡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논문을 쓰는 학기이니 학교에 자주 가지 않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웨이트리스 자리는 다 찼고, 접시닦이(디시워셔)만 공석이었다. 이미 주당 몇 시간으로 계약된 접시닦이가 있으므로 나는 그들이 휴가를 쓰거나 갑작스럽게 할 수 없는 날만 채우면 되는 것이었다.
아는 친구를 통해 들어간 것이라 지원서나 이력서도 없이 주방장과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는 5분 만에 끝났다. 일단 트라이얼로 해보고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트라이얼로 일하는 것은 돈이 지급되지 않는단다. 트라이얼로 일하는 시간이 약 5시간이었는데, 교통비도 주지 않는다고? 대신 점심은 무료로 지급한단다. 북유럽이라면 무릇 다르겠거니 하고 대단한 처우를 생각했던 나는 조금 놀랐다.
약 다섯 시간 동안 정신없었던 트라이얼이 끝나고 나는 채용되었다. 계약서는 전부 핀란드어로 되어있었는데 매니저는 하나하나 영어로 설명해주었다. 주로 쉬는 시간과 식비에 관한 내용이었다. 식비는 내가 한 번 밥을 먹을 때마다 5.6유로씩 차감이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시간당 약 10분씩 쉴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했다. 핀어를 못하는 외국인이자 써먹을 만한 기술이라곤 하나 없는 인문예술대에 있는 나는 다 동의하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핀란드는 법률 상 정해진 최저임금이 없다. 각 회사마다 시간당 임금을 제시할 수 있는데, 내가 계약한 레스토랑에서 제시한 최저 임금은 10.40 유로였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14,000원이다. 웨이트리스의 경우 술과 돈을 다루기 때문에 책임감이 더 필요한 자리이므로 시간당 11유로로 조금 높은 임금을 책정하였다. 경력에 따라 시간당 임금은 달라질 수 있는데 나는 레스토랑에서 일한 경력이 없으므로 10.40유로에 합의하였다.
한 번도 레스토랑 일은 물론 육체적인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 없는 나는 다가올 앞날을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순진하게도 할 수 있다는 의지만으로 덜컥 계약을 했다. 그러나 내가 계약한 곳은 미국식 바비큐 레스토랑이었다. 한 마디로 고깃집이다. 거대한 오븐 안에는 고기 몇 덩어리가 오랜 시간 동안 달궈지고 있었다. 오븐에서는 몇 개의 기름통이 나왔다. 스테이크 메뉴도 있었기 때문에 두 손으로도 들기 힘든 무쇠 팬이 가득했다. 감자튀김, 바비큐, 각종 소스 등 기름기가 많은 음식이 접시에 지독히도 흔적을 남기곤 했다.
또한 헬싱키 시내 중심가에 있는 레스토랑과 달리 그곳은 넓은 부지에 테라스가 펼쳐진 곳이었다. 본래는 도축장으로 쓰였던 건물이었는데 그곳에서 2012년도부터 레스토랑, 카페 등의 자영업자끼리 모여 사업을 시작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Teurastamo) 이런 특수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부지가 넓어 그만큼 많은 손님을 수용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핀란드인들이 가장 술을 많이 마시기 시작하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일을 시작한 때가 4월 초였는데 그때부터 해가 길어진다. 길어진 해만큼이나 핀란드인들이 마시는 술의 양도 늘어난다. 넓은 부지에 테라스까지 달린 레스토랑에는 맥주나 와인을 마시러 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내가 닦아야 할 와인, 맥주잔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계약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일주일에 최소 두 번, 한 번 갈 때마다 여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을 일했다. 계약서에는 일정한 시간을 두고 앉을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밥 먹는 시간 약 20-30분을 제외하고 앉아본 적이 없었다. 점심에는 특별히 할인된 런치 메뉴를 먹으러 온 사람으로 가득했다. 대낮처럼 훤한 밤에는 내가 닦아야 할 글라스잔이 수십 개가 마감하는 시간까지 늘어져있다. 처음에는 논문 생각 없이 하는 육체적 활동에 꽤 만족했으나 날씨가 좋아질수록 무섭도록 늘어나는 손님과 접시와 글라스잔을 볼 때마다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C바!) 글라스잔이 약 오십 개가 들어가는 트레이를 허리를 굽혀 수십 번 날라야 했다. 접시 닦는 것보다 최악의 일은 큰 양동이로 기름만 약 세 통이 나오는 거대한 오븐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기름 찌꺼기와 분리수거를 해야 될 쓰레기를 내 키보다 두 배는 큰 트레이에 실어 버리는 일까지 접시닦이의 몫이었다.
접시닦이에게 주어진 옷은 발 끝까지 오는 방수용 앞치마가 전부였다. 키가 170 센티가 넘는 나에게도 앞치마의 끝자락은 바닥까지 닿을 정도로 길었다. 어차피 각종 기름과 물로 범벅이 되므로 버려도 될만한 옷을 입고 앞치마 끈을 두 번 묶어 걸쳤다. 그 해 여름은 연일 30도에 오를 만큼 더웠다. 북쪽 나라에서 에어컨이란 사치품이었기에 레스토랑은 사우나나 다름없었다. 발 끝까지 오는 방수용 앞치마에 아래 위로 버려도 될만한 검은색 옷을 입고 오븐과 가스 불이 뿜어내는 연기를 견뎌야 했다. 땀과 기름에 절어서 직원용 화장실에 갈 때마다 잘 차려입은 회사원 무리들과 마주쳤다. 그들을 바라보며 서울 속 내 모습을 떠올렸다. 원피스를 입었던 것 같다. 긴 줄을 감내하고서라도 맛있는 점심을 먹겠다고 서있는 내 모습이었다. 나는 어쩌다 미국 시리즈 속 살인마가 입을 것 같은 방수용 앞치마를 입고 땀과 기름을 한 방울 씩 떨구며 걸어 가는가. 서울 속 내 모습이 간신히 떠올랐을 때 즈음 나는 다시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내가 지나간 자리엔 발자국마다 물기가 가득했다. 그 조차 남기고 싶지 않아 뛰어다녔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 나에게 새롭게 주어진 신분을 애써 부정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