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알토대학교에서 이어진 토론의 행렬, 그 가운데 길을 잃은 한국인
2017. 8
핀란드 알토대학교로 입학 허가를 받아놓고 시간이 남았을 때 국립현대미술관 소속 어린이미술관에서 자원봉사를 하였다. 나는 미술관에 방문하는 어린이들의 워크숍 활동을 도왔다. 짧은 활동 기간 동안 약 4세부터 초등학교 6학년까지 넓은 범위의 어린이들과 만났다. 나이, 소속 유치원이나 학교, 사는 지역도 달랐지만 아이들을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자기 방식대로 관람하는 아이 그리고 나에게 정답을 물어보는 아이였다.
당시 어린이미술관 활동에는 퀴즈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나는 "선생님 이거 맞아요? 혹은 "이렇게 하는 거예요?"라는 질문을 들었다. 대개 이런 질문을 하는 아이들은 어려운 퀴즈를 풀고자 하는 의욕이 넘쳤는데 유독 답을 적는 순간에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있음에도 그들은 확인받고 싶어했다.
핀란드에서 내 모습은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언제나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한국에서 인문계열에 있었던 나에게 조모임보다 개인 과제가, 발표보다는 리포트 제출이 훨씬 많았다. 순수 학문이었던 나의 학사 전공에서 토론 수업은 외국인 교수님 수업을 들어야나 가능하였다. (순수 학문일수록 토론이 장려되어야 하는데 이 점은 참 이상하다) 그러나 핀란드에 와서 나는 수많은 조모임, 발표, 토론에 시달렸다. 위 사진 속 수업 교수님 Kaija(까이야)는 현대미술을 가르쳤는데, 그녀는 한 번도 강의(Lecture)를 한 적이 없었다.
무려 5시간 동안 진행되는 이 수업은 토론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그날 배울 내용을 간단히 제시해주고, 이에 대한 평소 생각을 학우들과 나눌 수 있도록 하였다. 이제 좀 수업을 하려나 싶으면 생각할 거리를 다시 던져준다. 영상이나 글감 따위인데, 이론이나 작품에 관한 일목요연한 설명은 없었다. 언제나 한 가지 사안이나 현상을 두고 일어나는 찬반 논란에 우리를 욱여넣었다. 학생이 사전에 배경지식을 얼마큼 아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기존 지식을 시험하려 들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떠들고 있는 사안에 대해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을 전달할 수 있는 가를 보았다. 그녀는 토론을 이끌 때 틀렸다라고도 하지 않았다. 우주로 가는 것 같은 의견도 '그럴 수 있다'라는 표정으로 응해주었다.
까이야 수업 외 다른 수업에서도 역시 교수님들의 태도는 비슷하였다. 한창 A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점점 살이 붙여지면 수업 말미에는 토론이 거의 Z로 진행되고 있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교수님은 딱히 토론을 저지하지 않았다. 마지막 수업까지 교수님이 무슨 생각하는 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들의 미묘한 표정 변화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정답은 없다. 우리는 배우고 있는 중이다. 틀릴 것도 없다.' 나는 이런 프로파간다를 다른 세 명의 핀란드인 교수님으로부터도 느꼈다.
처음에는 '그래서 답이 뭐야?'라고 나에게 되물었다. 실은 속으로 '어쩌라고' 혹은 '그래서 결론이 뭔데?'를 외쳤다. 특히 토론이 거미줄처럼 무한 증식할 때마다 나는 토론을 저지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여기에 복병은 영어였다. 핵심에서 한참 벗어난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을 보며 '저건 아닌데'라고 하면서 영어로 반박할 수 없는 내가 한심했다. 그렇게 첫 학기 내내 투덜거렸다.
돌이켜보면 영어 실력이니 발표 두려움이니, 모두 변명이었다.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은 정답에서 벗어나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약 12년 동안 꽤 모범생으로 살면서 언제나 정답을 말할 준비가 된 사람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정답과 다른 선택을 하는 삶을 부러워 하면서도 매번 선택의 순간엔 정답을 내밀었다.
사고 회로에는 무수하게 어긋난 길이 있으며 학생은 이곳에서 마음껏 방황해도 된다. 내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났던 아이들을 다시 만난다면 하고 싶은 말이다. OMR 카드의 객관식 정답을 벗어난 지 약 1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말을 실천하기 어렵다. 생각보다 컴퓨터용 사인펜의 각인 효과는 강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