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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nfonia May 10. 2022

그 남자의 사랑법

틴더렐라의 여정 (4) - 유럽 연애에선 '오늘부터 1일'은 없단다

그와 두 번째, 세 번째 만남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논문을 쓰러 매일 학교 도서관으로 출근하였고, 그는 수업이 가장 많은 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마침 학교 도서관 옆에 새롭게 지어진 예술대 건물 내 학생식당은 가장 맛있는 곳이었다. 나는 매끼를 그 학생식당에서 해결했다. 공대 친구들은 가끔 그곳까지 원정을 오기도 했다. 그도 그 무리 중 하나였다.


어느 날 한국인 친구와 점심을 받으러 가는데 저 멀리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상투를 튼 머리에 가죽 재킷을 입은 그가 싱긋 웃으며 조용히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나는 눈웃음과 함께 입모양으로 'Hey'라고 말을 건넸던 것 같다. 우린 서로 아는 척을 크게 해서는 안 되는 관계처럼 은밀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만약 우리가 학교 수업에서 만났더라면 속삭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옆에 있던 한국인 친구가 나를 보며 물었다.


"언니 쟤 누구야? 되게 귀엽다"


히스레저가 나온 하이틴 영화 10 things that I hate about you 속 대사. 실제로 그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내 눈에만 귀여운 것은 아니었다. 키가 큰 핀란드인들 무리에서도 덩치가 커서 눈에 띄는 데다가 표정이 없는 핀란드인들과 달리 그의 주특기는 눈웃음이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저 멀리에 있는 그를 보자니, 첫 번 째 만남으로만 끝나기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논문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그 다짐은 의미가 없었다. 우연도 인연이라고, 우리는 학생 식당에서 여러 번 마주쳤다. 혼자 저녁을 먹으러 학생식당에 갔을 때였다. 밥을 다 받고 앉자 저 멀리서 걸어오는 그가 보였다. 그는 웃으며 내 맞은편에 자연스레 앉았다.


첫 번째 만남에서 보았을 때와 그의 눈빛이 다르게 보였다. 펍의 어둑한 조명 아래 봤던 그의 눈빛은 어딘가 헤프고 또렷하지 않으면서 허풍이 어려 보였다. 그럼에도 그의 눈웃음은 모든 의구심을 사라지게 만드는 비범한 능력이 있었다. 학생 식당에서 다시 본 그의 눈빛은 평범했다.


그는 같이 밥을 먹으려 했던 중국인 친구를 소개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아시안 여자와 데이트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그 때문인지 나에게 본인이 아시안과도 잘 어울리는 유럽인임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중국인 친구를 굳이 소개한 이후 그는 그 친구를 자연스럽게 다른 무리로 보냈다. 덕분에 우리는 틴더 데이팅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같은 학교를 다니는 외국인 학생으로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본인이 공부하고 있는 데이터 사이언스에 대해 무어라고 나불거렸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그가 조금 했다고 저녁을 다 먹었을 무렵엔 그가 진중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the dinner with you was very surprising and refreshing for me"


진심이었다. 매일 도서관과 집을 반복하며 호미 바바의 하이브리드 아이덴티티와 싸우고 있던 나에게 그와의 짧은 저녁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었다. 이 문자는 그와 나의 관계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 이후 우리는 두 번째, 세 번째 데이트를 했고 자연스럽게 주말마다 보는 사이가 되었다.


그 남자의 사랑법은 간단하고 또 복잡했다. 평일엔 어쩌다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 어쩌다도 주말에 약속을 잡기 위한 목적이었다. 암묵적으로 주말마다 보긴 했지만 그렇다고 주말이 끝나갈 때 다음 주말의 약속을 잡은 적은 없었다. 그는 나에게 진지한 적이 없었다. 이미 처음부터 그는 나에게 공표했다. "I am not serious" 라며 본인의 연애관이 그렇단다. 처음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집요하게 물었어야 했다. 이때만 해도 한국식 연애인 '오늘부터 1일'에 익숙했던 나는 유럽판 연애의 지형도를 감히 그려볼 수 없었다. 그 지형도에서 연애라는 여정에는 다양한 이정표가 존재했다.


1번. seeing each other

서로 주기적으로 데이트를 하는 사이. 한국에서 여자 친구와 남자 친구로서 으레 하는 모든 것들을 하지만 이 단계에선 서로가 '남자 친구, 여자 친구'라는 이름을 단 공식적인 사이가 아니다. 그러므로 동시에 다른 사람을 또 seeing each other 할 수도 있다.


2번. open relationship

1번보다 서로 종속된 관계이다. Relationship이라는 꼬리표가 붙었으니 서로는 여자 친구 남자 친구로서 책임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일대일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열린 관계일 뿐이다. 약속된 상대 외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 다만 이런 관계에선 서로 합의된 룰이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나는 오픈 릴레이션쉽을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안정적으로 관계를 꾸려나가는 걸 본 적이 없다. 대개 그들은 또 다른 사람을 만나기 위한 장치를 요란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3번. I am not serious.

3번은 더 독한 놈이다. 1번은 서로가 인지하는 단계이고 2번 역시 서로가 어찌 됐든 합의하여 맺은 관계이다. 그러나 3번의 경우, 경험을 돌이켜 보면 책임 회피용으로 자주 쓰이는 문구였다. 1번도 아니면서 2번도 아니면서 그저 모든 형태의 관계에서 장점만을 취하고 싶은 사람들이 주로 하는 말이다. 물론 1번 단계에서 이 말을 꺼낼 수도 있다. 하지만 좋은 남자라면 다른 표현을 쓸 것이다. 차라리 "I am not ready"가 솔직해 보인다.


그는 3번의 경우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음지의 커플이었나? 그는 진지하진 않았지만 동시에 일상적이면서 귀여운 연애를 하고 싶어 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평범한 일상 속으로 날 끌어들였다. 과 친구들과 같이 노는 자리에 날 불러 모두에게 소개하는가 하면(물론 이 또한 진지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본인의 생일 파티에 데이트를 하는 '그렇고 그런 사이의 이성'의 자격으로 날 초대했다. 나머지는 모두 친구들이었다. 물론 이것 모두 위장이었을 수 있다. 그가 날 만나지 않는 평일에 또 다른 공식적인 '그녀'가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모르는 체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등지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우리의 관계는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이 모든 건 틴더 때문이었다. 틴더는 GPS 기반 앱이다. 틴더를 켜는 순간 위치 정보가 업데이트된다. 무료 회원은 본인의 위치를 공개할 수밖에 없다. 서로가 틴더로 만난 사이라면 위치가 시시각각 변하는 순간 다른 마음을 먹게 된다. "요고 봐라, 틴더를 또 켰네?"라고 으르렁 거릴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주는 기능이다. 그러나 그의 프로필에선 거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틴더의 프리미엄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왓츠앱에서도 그는 마지막 로그인 기록을 숨겨놓았다. 그는 여러 장치를 이용하여 본인의 활동을 숨겼다.


나중엔 평일에 그 어쩌다 하는 연락도 비정기적으로 왔다. 의심이 쌓여갈 무렵이었다. 우린 다시 학생식당에 앉아있었다. 그는 가방을 열어 놓은 채로 자리를 비웠다. 활짝 열린 가방에서 수상한 동화책이 눈에 띄었다. 이제 막 뜯은 듯 포장지가 책을 덮고 있었다. 책은 '어린 왕자'였다. 나는 그에게 책을 선물 받았냐고 물었다. 그는 가방을 서둘러 잠갔다. "그냥 기숙사에 사는 친구"로부터 받았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누구냐고 물었다. 항상 자신만만하던 그는 말끝을 흐렸다. 


"아.. 안나라고..."


나는 안나의 존재에 대해 차마 더 물을 수 없었다. 진지하지 않다는 그에게, 그리고 약속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 관계에게, 대체 내가 무얼 심문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그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탓하는 수밖에 없었다. 안나 또한 핀란드인에게 흔치 않은 곱슬머리에 혹하여 그와 꼭 닮은 어린 왕자를 선물했을게다. 그가 식물을 키우고 싶다는 말에 선인장을 선물한 나와 같은 마음이었겠지. 그래도 일차원적으로 닮은 인물이 아니라 그보단 고차원적인 선물을 한 나에게 스스로 위안을 했다.


난 결국 그 관계를 포기하기로 했다. 정확히는 그가 주도하는 저울질 게임을 견디지 못했다는 말이 맞다. 그는 자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일상을 선택적으로 공유했다. 처음에는 나도 그처럼 '쿨하게' 대응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한참 모자랐다. 습관적으로 주말을 비어놓았고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쿨하지 못해서 미안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만나는 날끼지도 나는 우리의 관계에서 심령처럼 존재하는 '상상 속 그녀들'에 대해 언급하진 않았다. 자기 멋대로 자기가 되는 시간에 날 꾸겨넣는 그의 행태만 일일이 고하고 말았다. 진지하지 않은 관계에서 내가 탓할 수 있는 것은 애꿎게도 그의 시간 관리(time management) 능력이었다. 그렇다. 부지런해야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거다.


그 당시에 나는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틴더 프로필에서 말했듯 '스마트 앤 핸섬'한 자신에 취해있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본인의 못난 점을 감추고자 자주 불안해했다.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은 불완전함을 가리기 위한 위장이었다.


Eira 지역을 도는 트램. 이 지역은 걷기에도 데이트하기에도 매우 좋다. 


핀란드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지 약 1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나는 핀란드에 관한 꿈을 한 톨도 꾸지 않을 만큼 무표정한 직장인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헬싱키 항구 근처 고급 레스토랑이 즐비한 Eira(에이라) 지역을 걷고 있는 나를 보았다. 옆에는 상투를 튼 머리에 가죽 자킷을 입은 그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만남 초반에 그와 즐겁게 했던 데이트의 데자뷔였다. 그는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엔 그 자신이 아니라 나로 가득했다. 그는 문득 날 바라보더니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싱겁게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키 큰 그를 밑에서 우러러보며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꿈속 헬싱키는 흐릿했지만 그의 형상은 여전히 또렷했다. 꿈에서 깬 나는 헬싱키에 두고 온 말을 되뇌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스스로에게도 할 수 없던 말. 껍데기만 있는 애정을 어떤 형태로도 감싸고 싶지 않아서 깊이 묻어둔 말. 나는 그의 큰 키와 곱슬머리 그리고 눈웃음을 사랑하였노라. 잠꼬대처럼 그 말을 흘려보냈다. 내게 남은 미련은 꿈처럼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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