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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nfonia Feb 27. 2022

나는 똑똑하고 잘생겼어

틴더렐라의 여정 (3) - 곱슬머리 장발의 청년이 내뱉은 그 말 

논문을 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김없이 책상에 앉아 틴더를 켰다. 그때는 매일 게임을 하듯 카드를 넘겨보곤 했다. 가히 중독자였다. 그날도 심드렁하게 카드를 넘겨봤다. 그때 한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구불구불한 컬의 장발 머리, 큰 눈, 귀여운 미소, 살짝 여름 태양에 탄 듯한 피부. 역시 이름과 프로필을 보니 핀란드인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국기를 잘못 보았다. 프랑스인치고 상당히 키가 크다고 생각했다. 프로필에 적혀있는 사항은 간단했다. 


195 cm.

I am smart and handsome.


캐나다 가수 숀멘데스. 그는 대략 이런 이미지였다. 물론 이 정도로 초미남은 아니었지만 곱슬머리의 장발, 장신. 이런 공통점은 있겠다. 


겸손하다 못해 가끔 찌질하기까지 한 핀란드인에게 볼 수 없는 프로필이었다. 나는 '스마트 앤 핸섬'이라는 표현이 유치해서 웃었다. 자세히 보니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내가 편애하는 공돌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좋아요를 했고 놀랍게도 그와 매칭이 되었다. 


매칭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먼저 채팅이 왔다. 그는 나보다 6살이 어렸다. 심심풀이로 채팅이나 해야겠다는 마음이 컸다. 그래서 그가 나에게 만남을 제안했을 때 나는 논문을 써서 바쁘다고 핑계를 댔다. 이미 그때부터 나의 마음속에 두 가지 자아가 충돌하고 있었다. 그 남자를 한 번쯤 만나보고 싶은 자아와, 할 일을 하라는 이성적이고 엄격한 초자아. 자아가 간단하게 승리한 것 같았다. 그다음 주 월요일에 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 초자아는 자아에게 정신을 차리라며 엄격하게 회초리를 들었다. 나는 데이트 당일 점심에 약속을 취소해 버렸다. 


틴더 데이팅에서 당일 약속 파투는 상징적이다. 


1번, 처음부터 심드렁했지만 어쩌다 보니 데이트 약속을 해버렸다. 지금은 만사가 귀찮다. 

2번, 우리는 'never ever'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다. 


그 또한 이 의미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여자가 부정문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이미 백보를 물러서는 핀란드 남자가 아녔다. 그때 나는 담당 교수한테 내기로 한 초고를 완성하지 못했다고 핑계를 댔는데, 그에게 며칠 후 연락이 다시 왔다. 과제를 잘 완성했느냐고 물었다. 그의 끈기에 감복하여 나는 결국 데이트를 수락했다. 처음부터 나의 마음은 자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깜삐역 쇼핑몰 정문에서 보기로 했다. 깜삐역은 헬싱키의 시티센터이자 중심이다. 깜삐역 정문에 가까워지자 키가 매우 큰 사내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포옹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보통 핀란드에선 첫 만남에 포옹을 하지 않는다. 쭈뼛하게 악수를 건네는 핀란드 남자를 생각하니 그의 웃음이 헤프게 느껴졌다. 우리는 깜삐역 근처에 있는 펍으로 갔다.


그는 네덜란드인이었다. 나는 프랑스 국기와 네덜란드 국기를 헷갈렸던 것이다. 그는 유럽의 석사 프로그램으로 일 년을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보낸 후 핀란드에서 3,4학기를 보내기 위해 왔다고 했다. (EU 학생이 부러운 점이다. 여러 국가를 오가는 무료 석사 프로그램이 넘친다.) 석사 프로그램이 아니었으면 핀란드에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타지에서 외국인끼리 만나면 좋은 점은 이것이다. 그 나라에 사는 고충을 마음껏 나눌 수 있다. 핀란드 남자들이 항상 나에게 물었던 질문, "왜 핀란드에 온 거야?"라는 말에 가식적인 대답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핀란드를 긍정적으로 포장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핀란드를 까면서 시답잖은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이 자리가 틴더 데이팅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다. 대뜸 그가 말했다. 


"I am handsome and you are pretty, so we are a perfect match"

(나는 잘생겼고 너는 예쁘니깐, 우린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


맙소사. 나는 푸하하 웃고 말았다. 그의 프로필에 쓰여있는 자랑은 진심이었다. 나는 웃으면서 "Yeah,  I know (응, 나도 알아)"라고 대답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우웩, 알긴 뭘 알아?' 한국어로 문장을 번역해서 생각하니 꽤 느끼하게 들렸다. 마치 미국드라마 가십걸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겸양을 미덕으로 하는 한국인의 제스처를 취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지금 이 분위기도 촌스러워질 것 같았다. 나는 가십걸의 블레어 역할을 끝까지 해내기로 했다.   


대화는 생각보다 즐거웠다. 그는 생각이 많이 어린 사람이었다. 정제되지 않은 마음과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틴더 데이팅에 도대체 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감정과 대화마저도 절제하던 핀란드 남자들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논문의 주제로 잡은 '정체성'이니 뭐니 골치 아픈 이야기를 뒤로 하고 얄팍한 대화를 하니 그리 즐거울 수가 없었다. 이미 그와 데이팅을 결심한 시간부터 나는 성숙함에 대한 기대를 집에 놓고 왔다. 때로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케이크보다 한가득 쌓인 뻥튀기가 먹고 싶을 때가 있다. 그의 플러팅은(flirting) 뻥튀기보다 가벼웠다. 손은 만국 공통으로 호감을 표시하기 좋은 수단인 걸까. 그는 나의 손가락을 보며 "참 우아한 걸(so elegant)"이라고 슬며시 말했다. 


당시 버스를 탔던 중앙역 앞 버스정류장


우리는 다시 깜삐역에서 헤어졌다. 나는 다음 약속을 기약하지 않고 애매한 태도로 헤어졌다. 딱히 무언가를 약속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즐거웠으면 됐지 싶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손가락을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날따라 손가락이 유난히 길어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검지와 약지에 꼈던 실반지 두 개가 번쩍였다. 나의 실반지 만큼이나 은은하게 반짝이던 그의 눈빛이 함께 떠올랐다. 그 눈빛이 돌연 자신의 미모를 자화자찬할 때 진지해졌단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뻥튀기를 먹을 땐 대단한 기대가 없다. 아무 생각 없이 뜯어서 먹다 보면 어느새 반절이 없어져있다. 그게 뻥튀기의 매력이다. 그렇게 나는 심심풀이로 시작한 뻥튀기의 맛에 길들여졌다. 기약이 없을 줄 알았던 두 번째 데이트가 곧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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