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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nfonia Sep 22. 2022

은은한 차별은 왜로 시작해서 부정문으로 끝난다

네덜란드에서 3박 4일 그리고 핀란드에서 겪기 힘든 차별에 관한 이야기

2019 10 말에 친구들과 아인트호벤 디자인위크를 보러 네덜란드로 떠났다. 아인트호벤과 암스테르담을 합쳐  3 4일의 시간을 보냈다.  짧은 시간 동안 핀란드와 노르웨이에서   없는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차례나 겪었다. 저녁에 아인트호벤 구장 앞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취한 무리들이 우리에게 무어라 크게 소리쳤다. 그때 우리와 함께 저녁을 먹었던 아인트호벤의 한국 유학생들이 갑자기 그들을 향해 욕을 했다. 그녀들은 네덜란드인 무리가 우리에게 인종차별적인 욕을 했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이와 같은 일은 일상이라고 했다.  


아인트호벤 디자인 아카데미 졸업 전시장 앞. 낮에는 이렇게 평화로웠다.


그뿐 아니었다. 대낮엔 자전거를 타고 가는 어린 학생 무리가 '칭챙총'이라는 말을 하며 지나갔다. 디자인 위크가 열리는 전시 공간 앞에 있는 푸드트럭에서 샌드위치를 시켰을 땐 내가 주문한 것만 나오지 않았다. 나보다 뒤에 계산한 이들이 샌드위치를 가져가고 있었다. 내가 손을 들어 물어보려고 치자, 갑자기 이미 안다는 듯이 푸드트럭 점원이 '응 네 거 지금 줄게'라고 말했다. 점원이 실수로 나의 샌드위치만 누락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앞서 했던 경험 때문에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기 힘들었다. 무엇이 있는 그대로이고 사실인 걸까?


핀란드에서 3년 반, 노르웨이에서 약 5개월을 사는 동안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다. 북유럽에서 외국인으로 살면서 가장 감사했던 점이다. 물론 감사할 일이 아니라 응당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특정 인종 혐오 범죄를 보고 나면 일상이 안전하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다. 금발과 벽안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눈길 한 번 받지 않고 살았다. 그들은 나를 특별히 외국인으로 대해주지 않았다. 딱히 나라는 인종과 국가에 큰 관심을 표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내가 수업을 듣는 학생이라면 학생으로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아르바이트생으로서 대할 뿐이었다. 이런 핀란드에서 인종차별을 겪었다면 그것은 무지함과 차별 사이, 미묘한 경계에 있었다.


논문을 제출한 시점에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친구가 아는 다큐멘터리 영상 작가가 한국인 번역자를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북한에 관한 단편 영화의 국영문 자막 작업을 할 사람을 구한다고 했다. 이미 초벌 번역이 되어있는 국영문을 매끄럽게 다듬고 한국말 음성에 맞게 자막 싱크를 맞추는 일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하고 영상 작가를 만났다. 그녀는 말이 무척 많았고 큰 소리로 웃는 사람이었다. 이미 한국과 북한을 여러 번 갔다 왔다고 했다.


아르바이트 현장. 북한 사투리로 말하는 사람들의 인터뷰와 자막 싱크를 맞추느라 헤드폰이 필수였다. 내 이름이 보여서 모자이크 처리했음.


영상의 배경이 한국과 북한이므로 일을 하면서 한국에 관한 대화가 빠질 수 없었다. 지금은 한 나라를 경험했다고 반드시 그에 대한 감정이 호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지상천국 복지천국 핀란드를 외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내심 그녀가 한국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영상 작업을 하고 있으리라 기대했다.


어느 날 그녀가 한국에서 지냈던 숙소와 근처 동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나에게 여러 질문을 던졌다.


"왜 한국은 복도랑 화장실에 히터가 없어? 아니 그렇게 추운데 히터가 없는 게 말이 되지 않잖아"


"왜 한국은 하얀 빵만 먹어? (내가 본 핀란드인들 전부 호밀빵 부심이 컸다...) 파리바게트? 거기에서 먹을 게 하나도 없어서 한국에서 빵 사 먹기가 힘들었어. 왜 전부 단 빵만 먹어?"


이외에도 그녀가 나에게 던진 질문은 '왜'로 시작해서 부정문으로 끝났다.(질문이 많았는데 전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부정문이 끝나면 핀란드가 한국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을 했다. 핀란드에선 복도와 화장실이 뜨끈뜨끈 해서 추운 적이 없다. 핀란드에서 하얀 빵은 보기가 힘들다. 호밀빵은 건강하다. 결국엔 핀란드가 한국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설명하는 것 같았다. 물론 처음에 들었을 땐 문화 차이에서 비롯된 궁금증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녀와 작업을 하면서 나한테 하는 한국에 관한 질문이 모두 같은 맥락이라는 걸 알았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도 정확히 해줄 수 없었다. 나는 그러한 문화가 당연한 곳에서 자랐으니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 게다가 나는 문화인류학자도 아니다. 문화 차이를 실증적인 예시를 들어가며 설명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그런 질문을 왜 하냐고 버럭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녀가 정말 궁금해서 물어봤을 수도 있다. 그녀가 한국 문화를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기에 화를 내면 그 사람만 이상해진다. 순수한 의도를 곡해하는 꼴이 될 수 있다. 무지함과 차별의 차이는 모호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그녀의 질문을 핀란드 문화가 생소한 한국인 버전으로 바꿔 보겠다.  


"왜 핀란드는 고무타이어 씹는 맛이 나는 살미아끼를 먹는 거지?"

"왜 핀란드 사람은 그렇게 말이 없어? 뭐 어디 화났어?"


물론 이런 질문을 핀란드인에게 한 적은 없지만 나지막이 고백을 한 적은 있다. 살미야끼 못 먹겠다, 핀란드인이 과묵해서 친해지기 힘들다 등. 하지만 여기에 '왜'와 '부정어'를 붙이면 사뭇 뉘앙스가 달라진다. 만약 그녀가 한국에서 호밀빵을 구하기 어려웠다고 또는 한국의 숙소에서 방만 따뜻했다고 말했더라면, 나 또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화 차이에 '왜'와 '부정적인 시선'을 곁들이면 할 말이 없어진다. 서로가 차이에 대해서 인내심을 가지고 탐구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미 '왜'에 대한 답이 정해진 질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가 그때까지 만난 핀란드인과 모든 면에서 달랐다. 감정 변화가 얼굴에 다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말도 꽤 직설적으로 했다. 감정 기복도 심해서 어제는 친절했다면 오늘은 무례한 말을 던졌다. 어느 날은 나의 텍스 카드(핀란드에서 일을 하려면 텍스 카드를 신청해야 한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자세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당시 나는 텍스 카드를 재발급받아야 했다. 나는 그녀에게 단 한 마디만 했다. 텍스 카드를 신청해야 한다고. 그러자 그녀는 구구절절 텍스 카드와 핀란드의 복지시스템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그 또한 핀란드 세금정책과 복지시스템의 위대함을 설파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따라 나는 일이 끝나고 바로 친구와 약속이 있었다. 일이 끝나는 정각에 자리를 떠야 했다. 그녀의 열변이 끝나고 얼마 있지 않아서 내가 가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대뜸 그녀가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외국인인 너에게 텍스 카드를 설명하느라 15분을 쓰지 않아!"


나는 텍스 카드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었다. 내가 외국인이니 잘 모른다고 양해해달라고 한 적도 없었다. 내 잘못이 있다면 그녀의 긴 설명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는 것이다. 핀란드가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설파하는 레퍼토리를 자를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행동은 종잡을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졌을 때 그녀는 선물로 깻잎의 씨를 주었다. 그녀 역시 한국에서 깻잎을 먹어보았다고 했는데 그때 나는 깻잎을 좋아한다고 말했었다. 핀란드에서 구할 수 없어 아쉽다고 한 말을 기억한 것이다. 또한 내가 없었더라면 영상을 매끄럽게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아, 그래 그냥 시간당 급여를 줘야 하는데 15분이나 시간을 쓴 게 아까웠나 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감정 기복이 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말자. 그렇게 그 발언을 잊었다.


하지만 그녀가 나에게 항상 던졌던 질문은 가슴에 남았다. 문화를 대하는 새로운 기준을 마음에 새겼다. 특정 문화를 놓고 '왜'라고 시작해서 부정문으로 끝나는 질문을 하지 말 것. 그것이 의도한 차별이 아니라도 차별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것. 문장의 껍데기가 부정적이다 보니 열린 마음으로 질문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인종차별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다시 가보고 싶은 도시였다. 하지만 살라고 하면 당연히 NOPE.


어느 한 나라에서 인종차별을 겪고 나면 다른 인상은 크게 남지 않는다. 빨간 벽돌로 가득한 좁은 건물, 자전거를 타는 여유로운 사람들, 디자인 강국답게 예쁜 것이 넘쳐나는 도시, 음악까지 완벽했던 암스테르담의 클럽, 이 모든 것들이 쉽게 잊혔다. 대신 네덜란드 하면 아인트호벤 구장 앞 술 취한 남자 무리의 과격한 제스처와 알 수 없는 비웃음, 그리고 욕이 떠오른다. 그날 걸었던 밤길엔 서유럽의 아름다운 정취 대신 다른 감상이 남았다. 핀란드에서 어두움이 발 끝까지 드린 밤에 숲 한가운데 길을 걸을 때에도 느낀 적이 없는 공포이자 두려움이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타국에서 핀란드를 그리워했다. 핀란드인의 무관심, 무심함, 무사공평함이 그리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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