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저는 제가 단단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외부 환경의 변화나 빠르게 뜨고 지는 유행 같은 것에 휩쓸리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나만의 색과 신념 정도는 지키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거나 무시 받을지라도 생각 없이 남의 것을 따라하고 싶지 않고, 남들 또는 사회의 다수가 정해놓은 틀에 자신을 맞추느라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뭐가 잘못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노력 중입니다.
사회가 은근히 강요하는 틀에서 벗어나 공고한 나만의 색과 신념과 기준을 갖기 위해서는, 저 자신을 관찰하고 저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굉장히 많이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저를 알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스마트 폰으로 인해 습관적으로 또는 수동적으로 타인과 소통하는 시간은 늘어나고 자아성찰의 시간은 줄었습니다. 전 같으면 자아성찰은 아니더라도 멍이라도 때렸을 시간에 유튜브 추천 영상을 하염 없이 보거나, 단카방 또는 연인과의 채팅방을 통해 굳이 꼭 하지 않아도 될 일상 공유를 쉬운 방법으로 과하게 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점점 사람들은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어색하게 여기게 됐고, 타인의 시선을 삶의 중요한 기준 중 하나로 삼아 심지어 본인을 위해 어렵사리 마련한 시간의 대부분을 남들이 보는 사진 한 장을 위해 쓰는 것까지 딱히 서슴지 않게 됐습니다. 제가 저와 카톡을 뚫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할맨교?'라는 말을 들어가면서 굳이 문자메시지를 쓰고 있는 이유입니다.
저는 여러 방법들로 자아성찰의 시간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유독 여러가지에 느릿느릿한 편이라 남들이 하는 정도의 자아성찰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필요한 시간의 서너 배가 필요합니다. 그 때문에 저는 연락을 잘 씹는 사람, 심지어 가까운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화가 나게 하는 사람이 되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평소 제 행실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스마트 폰의 영향도 있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연락을 했지만 답장이 오지 않은 채 하루가 지나면 쪼매 불쾌하게 여기는 것을, 연인과 사소한 일상까지 모두 공유해야 해서 하루 종일 연락이 안되면 당장 주리라도 틀 것처럼 불같이 화내는 것을, 언제부터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을까요. 우편, 이메일, 삐삐, 유선전화만으로도 아무 문제 없이 소통했고, 만났고, 협업했고, 사랑했던 그 때로부터 불과 얼마나 지났다고 말이죠.
제가 '할맨교?'라는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는 건가요? 쳇, 이렇게 IT 기기를 다양하게 많이 쓰는 할매가 어디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