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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무역 Oct 20. 2021

회사의 얼굴

모든 신입사원은 수문장에게 전입신고할 것.

"일찍 갈 수 있을 때 가라."


시간이 지나면 사수의 이 건조한 조언도 사치로 여겨질 날이 올 거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일에 삼매경인 다른 직원들보다 먼저 사무실을 나서며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 그럼으로써 유일하게 정시에 퇴근하는 직원이 된다는 것은 온종일 할 일 없이 책상을 두드리며 앉아 있었던 것만큼이나 어려운 수습사원의 마지막 일과일 터이다.


"나 오늘 눈치 보느라 한 대도 못 폈다. 한 대만 태우고 가자."


흡연자인 동기 녀석은 자대 전입 후 <2주대기>를 하던 신병시절이 떠오른다며 잠시 사옥 뒤편 한 구석에서 꽁초를 지필 것을 청했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내가 아닌 다른 수습사원, 즉 동기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며 오늘 하루를 버텨냈는지 듣고 싶었으므로 함께 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회사 뒤편 흡연장으로 향했다.

     

“어, 어, 잠깐,”


장년의 낯선 목소리가 우리의 뒷덜미를 잡았다. 신입의 생존 레이더로 분석했을 때 부장/이사/본부장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정말 새로운 목소리였다.     

뒤돌아보니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수위 영감이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것이었다.

이미 사무실에서의 ‘무능하고 무의미했던 피곤함’으로 흠뻑 젖은 우리가 입도 열기 귀찮아 눈으로 무슨 일이냐 물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60을 넘겼을 것이다. 어쩌면 몇 년 전까지는, 여느 직장에 있었을 법한 어른이다.

혹시 모른다. 우리가 막 입사한 이런 기업의 한에서 일했을지도.

정년을 마치고 남은 일상을 위해 찾아낸 재취업 자리가 이 회사 수위실이었을 것이다.

     

“어허,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들인가?”

    

그는 마치 첫 등굣길의 신입생들을 막아선 골목대장이나 막 입영한 장정들을 인계받은 훈련소 교관처럼 두 팔을 허리에 얹고 여유로운 미소로 우리에게 물었다.

   

“아, 예”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을 한다.     


“아니, 그렇다면 마땅히 이 수문장에게 신고를 하는 게 옳은 순서 아닌가! 응?”     


그는 이제 버럭 호통을 친다.

혹시 그는 군인 출신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에 준할 만큼의 위계 의식이 만연한 조직과 세대에서 평생을 보냈을 것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우리의 어엿한 ‘입사 선배’이고 지금처럼 굴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수도 있겠다.


이렇게 그의 의도를 짐작한 나와 동기는 그제야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어색하게 목례를 했다. 

하지만 수문장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하다. 아마 ‘잘 걸렸다. 이놈들’하는 마음으로 어수룩해 보이는 두 마리의 신입사원을 맛나게 먹어치울 하이에나로 변하는 중인 듯하였다.


“만약 깜빡 잊고 사원증이라도 안 가져오면 응? 누가 문 열어 주나? 내가 얼굴하고 이름, 소속을 알아야 문을 열어주지? 응? 그러니까 가장 먼저 이 수문장에게 신고를 해야 하는 거야. 그런가, 안 그런가?”


어쩌면 그는 나름 자신의 일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말 자신을 수문장이라 여기며 내가 순간이나마 작은 일이라 여긴 경비직이 그에게는 어떠한 프라이드로 자리 잡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기와 나는 그의 ‘놀이’에 장단 맞추어 줄 여력은 없었다. 하루를 마감하는 의식 삼아 연초를 한 대 태우고 조만간에는 더 이상 누리지 못할 이 ‘칼퇴근’의 혜택이나 챙기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나와 동기 녀석은 무표정하면서도 적당히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하하.”     


‘얼른 끝내자’는 메시지를 담아 서로 눈길을 교환한 우리 두 신입은 정말 신병처럼 때 아닌 입사신고를 한다.  


“해외영업팀 신입 ***입니다.”

“같은 팀 사원 ###입니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생각했는데 그는 손을 앞으로 휘저으며 말한다.     


"에이, 늙은이가 이런 거 한 번 들어서는 모르지~"     


그리고는 우리 목에 걸린 사원증에 손을 뻗어 군번줄처럼 당기더니 얼굴과 이름을 한 번씩 살펴본다.      


“어, 이 친구가, *** 그리고 이쪽이 ###, 오케이”     


그제야 마지막 훈시를 하려는 듯 다시 ‘교관 포즈’를 잡는다.     


“사실 오늘 점심때도 왠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회사에 들어가나 했다고, 내가. 잡을까 하다가 혹시나 신입인가 싶어서 놔둔 거야. 나는 회사의 얼굴들을 다 알아야 하는 게 잡(Job)이여. 앞으로 계속 볼 건데 항상 이 수문장에게 입사신고를 할 수 있도록 나중에 후임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쳐놔, 허허허허”

    

"네네, 하하하."

     

내가 웃음 지어 답하는데 동기 녀석은 슬슬 지겹다는 표정이다. 하루 종일 기다린 담배를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태워서 튕겨버린 것이 영 불쾌한 모양이었다.     


“거, 저, 양코들 말은 좀 하나?”

    

아직 놓아줄 생각이 없는 이 양반도 적잖이 심심하던 차였나 보다.

양코들 말이란, 아마 영어를 말하는 듯하다.

     

“예, 알아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동기 놈의 퉁명스러운 대답이고,


“분발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싸가지 없게 들릴까 봐서 내가 얼른 덧붙인다.

     

“알다시피, 우리 회사는 수출 중심이라 이 양코 말이 완벽해야 한다고. 만약 양코 말 잘 못하면....... 아주 힘들어지지.”     


갑자기 그의 이력이 궁금해진다. 그러나 질문과 대답을 포함한 모든 발언권은 수문장께서 쥐고 계셨다.


그렇게 우리의 첫 야근이자 야간학교가 시작되었다.

다시금, 어떤 무게가 주는 피로와 함께 나는 체념으로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고 동기는 등 돌려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인다.

하루는, 마감되기에는 아직 남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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