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출장의 끝은 내 업무의 시작이구려
"야, 굳이 본사 들리지 말고 저녁 식사 때까지 얘네 관광이라도 좀 시켜줘라."
해외 내방객이 생산공장을 방문한 미팅 현장.
대화가 잘 풀렸다고 생각했는지 썩 기분이 좋아진 상무님은 주변을 둘러보며 한국말로 이야기했다. 시선은 주변을 모두 아우렀지만 결국 나한테 하신 말씀이렸다. 나는 일단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내방객을 렌트차량에 태우며 고민한다.
"기사님, 이 친구들 서울에서 관광 좀 시켜주려 하는데 혹시 괜찮은 곳이 있을까요."
여러 회사의 의전업무를 거친 베테랑 기사님의 고견을 여쭙는다.
"관광? 경복궁이 제일 무난하지 않나. 널찍한 데서 구경 좀 하다가 철수하면 될 거 같은데."
내가 경복궁을 떠올렸을 때는 좀 진부한가 했는데 베테랑 기사님의 의견이 더해지니 썩 괜찮은 옵션으로 여겨진다. 사실, 유일한 옵션이기도 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이 없다. 명동은 요란하고 인사동은 장년층이 끼어 있으니 계속 걷게 하기 난처하다. 경복궁을 꼭 모두 돌지 않더라도 공원처럼 쓰면 어떨까 하는 것이 내 계산이다.
"가시죠. 경복궁."
출동하듯 기사님께 말한다.
"멋진 회사야, 공장 엄청 근사하던걸."
"이 회사 회장이 자기 아버지 삼남이라 했나? 형제끼리 하나씩 맡아서 서로 돕나 봐. 좋은 그림이야."
가이드 속도 모르고 관광객들께서는 분주히 서로 의견을 나눈다.
"여기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궁전(Palace)이야. 경복궁이라는 곳이고 왕이 살던 곳이야."
"이 돌들은 뭐야. 왜 일렬로 세워져 있지."
가리키는 손 끝에는 정일품, 종일품 등 품계가 쓰인 돌조각이 일렬로 서있다.
"신하들의 Grade를 나타내는 것이야. 봐봐, 1급에 가까울수록 왕이랑 가까워지지?"
"와아, 그렇구나. 근데 왜 똑같은 렬이 양쪽에 있지?"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이들은 나보다 더 모른다. 그러므로 찍어본다. 어차피 영업사원의 8할은 혓바닥이다.
"이쪽은 문관이고 저쪽은 밀리터리야."
"Oh, I see. Make sense"
그래, 너만 만족하면 되었다. 그리고 아마 맞을 것도 같다.
경복궁을 얼추 다 돌고 먼발치에서나마 청와대도 보여주며 설명했을 무렵, 슬슬 사무실로 돌아가려는데 일행 중 하나가 말한다.
"알렉스, 근처에 아무 Mall이나 갈 수 있나? 아내 선물을 사주려는데."
나도 출장자여서 가족의 선물을 챙기고자 하는 마음은 안다. 꼭 바이어여서가 아니라 이 요청은 들어줘야겠다.
"기사님, 백화점을 가야겠는데 동선 고려했을 때 신세계 본점하고 아예 강남 넘어가는 것하고 어디가 더 나을까요?"
"지금 시간이면 차라리 신세계가 나을 거예요."
백화점에 내려놓으니 되게 Fancy 한 곳이라며 두리번댄다. 지칠 무렵인지 가장 연로한 사장은 아무거나 사서 돌아가자고 하는데 백화점을 가고 싶다던 그 직원이자 사장친구는 값비싼 물건 들 중 가장 가성비 좋은 것을 찾으려 애쓴다. 중간에 와이프 욕도 하는 듯하다.
"그럴 거면 왜 챙겨주니?"
"걔가 먼저 사 오랬어."
그래, 애초에 비즈니스 현장에서 인문감성을 느꼈던 내가 루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