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치의 삶이 계속되는 한
ㅇ사의 미국 법인장이었던 K는 동향사람이었다.
사무실에서 주워들은 그의 이력이란, 고향에서 가장 좋은 고등학교를 나왔고 서울의 명문대학을 졸업한 후 평생 ㅇ사의 임직원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 법인장 겸 상무이사를 마지막 보직으로 그는 퇴직했다. 전무 승진에서 경쟁자와의 경합했고, 누락했다고 하니 아쉬움이 남는 퇴직이었을 것이다. 고향사람으로서 함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ㅇ사는 임원이 퇴직하면 2년간 고문으로 데리고 있는다고 했다. 겉으로는 퇴직임원에 대한 예우 겸 복지의 연장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중역 출신 퇴직자가 바로 재취업하는 것을 막아 회사 대외비의 유출을 막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 그 시간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ㅇ사의 경쟁사인 우리 회사가 영입하고자 했다.
오늘 회식은 그의 계약 결정을 앞두고 우리 상무가 만든 자리였다.
"제가 술을 잘 못 마십니다만, 첫 잔은 헌법에 의거해서, 한번 말아보겠습니다."
술을 못 마신다는 자가 소맥을 주도하다니, 역시 저 세대 임원은 고스톱 쳐서 다는 것이 아니구나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딱한 마음도 들었다. 맞은편의 우리 상무와 부장 등은 실실 웃으며 소맥을 마는 그를 기다렸다.
한 잔, 두 잔, 술잔을 비우랴 고기를 구워 고참들 앞에 놔주랴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K는 세 번째 소맥을 말고 있었다. 그 헌법이란 것에 의거하면, 세 잔까지는 무조건 말아마셔야 한다나. 술을 잘 못한다는 것은 농담이었나 싶다. 혹은 평생 동안 이어졌을 원치 않는 술자리에 스스로 단련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부장이 말하는 것처럼 [중년의 훈장]이라는 지방간을 그도 달고 사는지 모른다.
자리가 파하고 우리는 K를 들여보냈다.
"아무튼, 계약하게 되면, 잘 부탁드립니다."
"네, 상무님, 함께 일하게 되면 잘 부탁드립니다."
K가 길을 건너자 우리는 상무를 중심으로 원을 그려 모였다. 상무에 말에 따르면 우리 회사가 제시안 보수 안이 K의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가 정말 계약을 할지 안 할진 모르지만 자신이 영업비 명목으로 다만 얼마라도 더 높여줄 생각이라는 말과 함께 상무는 우리의 퇴근을 허락했다.
K는 결국 우리 회사의 자문역을 받아들였다.
다시 그의 회사생활이, 생각보다 일찍, 한때 경쟁사였던 우리 회사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출신사에 남아있는 후배들은 가장의 속도 모르고 뭐라 떠들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K는 다시 회사라는 술상에 앉았다. 현역때 받던 보수보다 더 못한 봉급으로 후배들의 술안주가 될 각오를 하고 말이다.
술을 잘 못한다면서 소맥을 연거푸 적시는 K와 지방간은 중년의 훈장이라는 우리 부장을 보면서 나는 스스로 건강 조심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어쩌면 회사라는 것에 내 모든 비전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늦은 퇴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