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핑은 나에게 필요한 네 가지 말을 가지고 있었다.
크리스는 소리 질렀다.
"마마! 일어나"
크리스의 소리에 작은 보드 위에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기다렸던 파도가 왔다. 이제 일어나기만 하면 된다. 크리스는 더 크고 빠르게 소리쳤다.
"마마, 지금 일어나!"
마마라는 그들만의 존칭이 마치 엄마라고 들리는 것 같아 별로지만 그보다 더 별로는 때맞춰 일어나지 못하는 내 몸뚱이였다. 다 차려진 밥상에서 숟가락만 든다는 어느 배우의 말처럼 나도 서핑에 딱 맞는 파도와 알아서 타이밍을 알려주는 가이드의 말을 따라 일어나기만 하면 됐는데 그 걸 하지 못했다. 내 맘도 모르고 크리스는 아쉬운 듯 "마마아~ 왜? 안일어나아~~~"
서핑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마 일어나'라는 말이 한동안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평소에 운동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서핑을 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사용하지 않았던 근육을 쓰는 것만으로 벌써 허리와 다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첫날 첫 시간부터. '아이고 허리야'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크리스는 꾸따에 사는 서퍼다. 그냥 모습만 보아도 그가 서퍼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까만 피부에 반바지 수영복을 맨발로 입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나에게 직업을 묻곤 했다. 자유로운 척하며 다른 일을 하는 듯 보이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용하게 맞추었다. 머리 때문인가? 안경 때문인가? 물었을 때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투 때문이라고 했다. 어떤 말투인지 잘 설명하긴 어렵지만 선생님 같다고 했다. 나는 좀 자유로워 보이고 싶었지만 공교육 기관에서 20년 일한 내가 자유로워 보일리 없었다. 지난 시간 속에서 내 말투도 사각형 교실 안에 맞춰졌는지 모르겠다.
크리스는 긴 곱슬머리가 잘 어울리는 20~30대 남자였다. 반바지 하나와 슬리퍼 하나로 일 년을 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가 정말 자유롭다고 느끼게 해 준건 그의 분위기와 말투였다. 친절하지만 가볍고, 가볍지만 진솔해 보였다. 안 되는 것에 매달리거나 고집하지 않고 파도를 읽으며 자연에 기대어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친절하면서 진중하고, 진솔하지만 무거운 나의 말투는 누가 봐도 선생님 같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그럼에도 그가 나에게 했던 말들은 내 삶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말이었다.
레디. 일어나. 지금. 잘했어
인도네시아 사람인 크리스는 이 네 가지 말로 충분히 서핑을 가르치고 있었다. 서핑은 나에게 필요했던 네 가지 말을 가지고 있었다.
준비된 사람이 기회를 잡는다는 말은 서핑에 그대로 적용된다. 서핑을 하기 좋은 파도는 계속 밀려왔지만 소금기 가득한 물로 눈도 뜨기 어려웠던 나를 파도는 계속 덮쳤다. 서핑보드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보드를 잡느라 손은 너덜너덜해 졌다.
좋은 때를 기다려 파도를 타야 하지만 나는 어느 것이 좋은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크리스는 좋은 파도가 왔을 때 어김없이 '레디!'라고 소리쳤다. 이제 좋은 기회 즉 좋은 파도가 온다는 뜻이다. 당연히 그는 파도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었고 나는 없었다. 나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비기닝 서퍼니까 당연했다.
크리스가 '일어나'라고 소리치면 나는 몸을 일으켜 빨리 발란스를 맞춘다. 뒤에서 크리스가 소리치는 게 들린다. '발란스, 발란스' 나의 자세가 틀렸다는 뜻이다. 기본자세를 다시 잡으라는 뜻이다. 보드의 중앙에 발을 가로로 놓고 시선은 먼 곳을 바라보라고 했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고 넘어지고 넘어졌지만 크리스는 잘했어! 마마라고 말했다.
서핑을 하며 들은 네 가지 말은 비단 이 작은 보드 위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짧은 네 가지 말이 내 삶에 순간순간 필요했다.
올해 학교를 옮기고 첫날 제일 많이 들은 말은 '00 예쁘죠?'였다. 00은 미소천사예요 했다. 지금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첫날 지체장애학교에 도착한 나는 특수교사임에도 모든 것이 생소했다. 일반학교에만 근무하다가 특수학교에 근무한 지도 4년밖에 안되었고 이제 막 지적장애학교에서 지체장애학교로 발령 난 첫날이었다. 중 1학년인 아이가 15kg밖에 안되고 사지마비에 인지도 한 살 정도 지능을 가졌으랴나.. 이 아이의 담임이 되고 나는 아직 어느 한지점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 준비없이 엄마가 되었다고 느낀 그날처럼 내가 특수교사로서 자격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 시간 준비했음에도 아이가 태어나고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된 것처럼 오랜 시간 해왔던 일이었지만 나는 막상 아무 준비도 없이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아이의 엄마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나는 이 아이에게 무슨 교육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
나는 이 아이 앞에서 괜찮을까?
아빠를 돌보라는 어른들의 강요 앞에 무력감을 느끼던 어린 나의 상처도 들춰지기에 충분했다. 작은 세포에 새겨진 자아들이 각각 역할을 하며 등장했다. 두려워하기도 하고, 나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기도 하고, 할 수 있다고 독려하기도 했다. 겉으로 나는 웃을 뿐이었지만, 내 속은 납기일을 앞둔 공장처럼 순간 변해버린다. 그때 내가 두렵고 힘들다고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아빠를 돌볼 힘이 없는 이제 8살이예요. 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죄책감의 굴레에서 조금은 더 자유롭게 살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지금 나에게 용기를 준다. 과거가 오늘 나에게 용기를 준다.
"00 예쁘죠?" 교장선생님의 말은 나에게 빨리 예뻐하라는 강요처럼 들렸다.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준비되지 않은 마음이었다. 교장선생님도 잊지 않고 한마디 덧붙였다. "00는 우리 학교 미소천사야"라고 말했다. 오늘만 몇번 들었을까? 나는 이제 나에게 솔직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흔아홉이었기에 말했다.
"천천히 예뻐할게요~"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의 감정을 누르며 때때로 살아가야 했던 순간 때문이었는지, 크리스가 끝없는 바다를 앞두고 까만 얼굴로 웃으며 말하는 '레디! 마마 일어나!!'라는 말 깊은 곳에서 진동을 만들었다. 이 작은 보드 위에서 나는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다. 미약함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의 미약함이 드러난 이 작은 보드 위에서 차라리 더 누워버렸다. 그건 서핑을 배우는 것에서 멈추기보다 마치 내 삶의 속도에 맞춰 다시 일어나고 균형을 잡고 살아가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 같은 것이었다. 나에겐 나의 속도가 있으니까.
서핑을 하며 나는 자주 알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고 파도의 거품처럼 사라질 때까지 그저 지켜보았다. 무엇이어도 되어도 좋고, 무엇을 하지 않아도 좋고, 그저 하루 하루 살아가면 된다는 그냥 두서없고 잘 모르는 생각들을 하며 저 멀리 수많은 서퍼들을 바라보았다. 끝없는 바다 위에서 둥둥 떠있는 수많은 서퍼들을 보면서, 파도를 가르며 라이딩을 하는 서퍼들을 보는 데 그저 위로가 되었다.
셔핑을 하고 싶었던 건 우연히 유튜브에서 서핑을 하는 영상을 봤을 때였다. 복잡했던 생각이 발리에 가면 사라진다는 정재영의 말을 듣고 나도 그곳에 가 보고 싶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우붓이었다. 우붓으로 가는 길에 들른 곳이 꾸따였다. 꾸따에 왔으니 한 번쯤 서핑을 경험해 보자는 마음이 있었지 내가 정말 서퍼가 돼서 자유로이 파도를 탈 수 있다는 목표는 애초에 없었다. 그런 꿈은 꾸지도 않았다. 단지 경험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만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말.. 일어나 라는 말, 그 말은 나에게 수 없이 해왔던 말과 같은 느낌이었다. 쓰러지면 안 돼! 다시 일어나야 돼! 나는 할 수 있어! 수없이 되뇌었던 말과 왜 그랬는지 같은 말처럼 느껴졌다.
일어나라고 소리치는 크리스의 말에 나는 반대로 '넘어져도 돼, 못 일어나도 돼'라고 속으로 말했다.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했던 경험처럼 크고 거대한 좌절이 기다리고 있지 않다. '넘어져도 돼. 원래 그런 거야. 처음부터 잘할 순 없어'라는 말이 나왔다. 일상에서는 쉽게 나오지 않는 말이었다. 파도 위에서 수없이 넘어지며 좌절은 삶에서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해 준다. 처음 하는 일이여도 잘해야 했고,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들로 채워져 왔던 삶이 스쳐갔다.
서핑을 배운 첫날 다음 여행지였던 우붓의 숙소를 취소했다. 어떤 것은 환불기간이 지나기도 했고, 어떤 예약은 가능하기도 했다. 서핑을 하며 나에게 좌절을, 나에게 용기를, 나에게 위로를 주고 싶었던 것인지., 그때는 몰랐다. 동행한 둘째 아이에게 그저 가볍게 말했다.
"이거 재밌는 데 우리 더 할까?"
마흔아홉 서핑이 하고 싶어서, 꾸따에 더 머물기로 했다.\
*연재요일을 못 맞추고 있어요. 그래도, 브런치에 마음을 더 두고 싶어서 연재라는 형식으로 발행합니다. 일상을 보내며 글을 정기적으로 쓰시는 분들을 존경합니다. 대단하세요. 발행일이 다르더라도 삶의 다른 장면에서 분주하겠거니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