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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섭섭 Oct 24. 2021

서울 사람의 인간관계

선택지가 주는 아이러니


 서울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생활하는 공간이다. 2020년 기준 총 25개 구 424개 동으로 구성된 서울은 9,985,652명이 거주하고 있다. 경기도 인구의 이동과 다른 지역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사람들까지 생각하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복작복작하는 곳이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서울에서 서울 사람의 인간관계는 복잡하다. 물론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나는 친구 없는 내향형 인간이야’ 

'나는 아웃사이더여서 친구 별로 없어'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인간관계는 단순히 친구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생활하면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관계를 지칭하는 것이다.

 

  우선 서울 사람들에게는 서울의 대중교통과 마찬가지로 너무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 현대 사회는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뭔가 유의미한 사회적이고 사교적인 활동을 해야 할 것처럼 이야기하고, 인터넷에서는 인싸와 아싸의 비교를 통해 계속해서 사람을 만나고 교류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가지게 만든다. 게다가 밤늦게까지 움직이는 지하철과 버스, 그리고 복잡하게 연결되어 멀리까지 갈 수 있게 만드는 대중교통은 역설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안 만나는 선택을 각 개인의 선택으로 만든다. 즉 내가 의지가 있다면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마치 그 선택을 거부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좋은 관계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의 처지를 배려하고 밤에 부르면 택시비만큼이라도 술값을 덜어주는 센스를 보이는 것이지만 인생에서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도 어려운데 직장 동료나 상사라던지, 거래처의 사장 이러던지, 학교의 먼 선배라던지 이런 사람들이 그 정도 센스를 발휘할 정도로 좋은 사람들이었다면 한국사회가 이렇게 팍팍하지 않았을 것이고 서울 사람의 화도 적게 날 것이다.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는 조금 달라질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나의 부모님이 거주하고 있는 양양에서는 마을에서는 8시가 넘어가면 모든 집이 조용해지고, 시내에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가용을 이용해야 하며, 30분 이상을 차를 타고 나가면 그 시간에 문 여는 곳은 편의점이거나 술집밖에 없다. 자가용을 타고 가야 하는데 술집으로 부른다는 것은 음주운전 같은 불법을 종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리비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사람을 부를 수 없다. 늦은 시간에 만나자고 하는 것은 이미 술 취한 주정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거절을 한다고 해서 누군가 서운해하거나 내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이것은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로 가도 생각해 볼 수 있다. 60만 인구가 거주하는 전라북도 거점도시 전주에 처음 살 때, 나는 전주에서 알게 된 사람과 맥주를 한잔 마신적이 있다. 전주 사람이 “제가 막차시간 때문에 곧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시간은 9시 30분쯤이었고, 나는 서울 사람처럼 “그럼 10시 반쯤 일어나면 되겠네요”라고 말했다가 서울 촌놈 취급을 받았다. 전주에서는 10시 전후로 버스가 끊기기 때문에 지금 일어나야 한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150만 인구가 사는 광역도시 대전광역시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택시를 타면 늦게까지 이동할 수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택시는 사치재이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다는 것은 높은 수준의 결단력과 재정적 지출을 필요로 한다.  


  사람을 만난다는 행위는 기회비용이 존재한다. 이동시간, 이동 방법, 지출하는 비용, 사람을 만나서 소비되는 사회성 등 다양한데, 서울 사람에게는 이동시간과 이동 방법이 꽤 늦은 시간까지 제공되며 그 선택지가 다양하다.  문제는 서울 외 지역 사람들과 서울 사람들의 감각이 다르다는 데 있다. 서울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꽤 먼 거리를 이동하는데, 출퇴근 시간으로 한 시간은 흔히 있는 일이고 친구를 만나기 위해 지하철 두 번 환승해서 40분 거리를 이동하는 것도 흔한 일이다. 그렇기에 늦은 시간에 사람을 만나는 행위나 30분 이상 걸리는 거리를 이동하여 사람을 만나는 행위는 대체로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사람을 만나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것은 ‘갈 수 있음’에도 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방도 알고 있고 나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서울은 기본적으로 만남을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만남을 거부하기 힘든 공간이기도 하다. 


‘밤이 너무 늦어서’ 

'너무 멀어서' 


라는 말은 거절의 명분이 되기 어렵고, 만남을 거절하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이유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 예를 들어 너무 피곤하거나 아프거나 중요한 일이 있거나 그런 것들 말이다. 그렇기에 서울 사람들은 상대방이 나를 만나는 것을 선택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고 쉽게 서운함을 느끼기도 하며 거절하는 사람은 거절하는 대로 미안한 마음과 만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힘들어하기도 한다. 도시는 편리할수록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 주지만 그와 동시에 관계의 풍화를 더 가속화한다.

 

  서울 사람들이 인간관계에 더 큰 스트레스를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울 사람들은 편리한 만큼 멀리 이동하고 자주 이동하며 자주 사람과 마주하게 된다.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과 버스에서 치이고, 직장에서 치이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 주변에서 바쁘게 움직인다. 서로가 서로를 쳐다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더 예민하며 더 스트레스받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만나서 약속을 잡는 것은 어떨 때는 좋고 재밌고 힐링되는 순간이지만 어떨 때는 부담스럽고 스트레스받고 감정노동을 해야 하는 순간일 수도 있다. 친구는 매 순간 좋은 순간을 선물하는 평점 5점짜리 맛집이 아니며 우리는 서로 미숙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서운할까 봐 의무감에 사람을 만나다 보면 그 의무감에 짓눌려 결국 내가 서운해진다. 


  가끔은 내 선택이 아니라 자연이 제공하는 어둠이 선택을 대신해주는 삶도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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