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록 '의자'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이 시는 한참 전에 만나 무척 좋아하던 작품이다.
푸근한 어머님의 넉넉한 마음씨가 느껴져서 흐뭇하고, 마치 따뜻한 석양볕을 쬐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 뒤로 바쁘게 살며 잊고 살다가 십여 년 만에 다시 만났다. 어찌나 반갑던지. 마치 이름조차 잊고 살았던 친구를 길거리에 만나서 두 손 잡고 방방 뛰듯 반겼다.
'의자'가 저렇게 든든하고 믿음직한 것임을... 그래서 의자를 내어 주는 것이 얼마나 이타적인 행동인가를 알게 되었다. 한겨울 버스 정류장 의자에서 식빵을 굽고 있는 길냥이만 보아도, 의자가 잠시 쉬는 곳이 아니라 생을 지탱해 주는 무엇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생전에 아버지는 항상 말씀하셨다. 왜 큰아들만 이뻐하냐는 투정에,
"아들은 울타리여."
도대체 그 울타리가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었는데, 이 시를 다시 보니 아마도 아버지께서 마음으로 기대어 앉았던 의자인 모양이다. 몇 번이나 그 의자에 앉아 쉬셨는가는 아버지만 아실 것이니. 참 깊고 깊은 그 관계를 어찌 짐작할 수 있을까? 철없는 나의 투정이었지.
이정록 시인은 먼 시골학교까지 찾아와서 특강을 해주셨던 고마운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