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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노

옆에 있던 곰이 먼저 말을 걸었다.

“끅끅끄으윽~”

이제 바로 알아듣겠다. 괜찮냐고 물었다. 역시 착한 곰이나. 처음부터 지금까지 놀란 나를 달래주고 지켜준 고마운 곰이다. 눈물을 쓸어 담으면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끅끅끄으윽”

내 대답에 손을 들어서 어깨 위에 얹어주었다. 아니 앞발이라고 해야 하나. 그 툭 올려진 손이 어찌나 무겁던지 잠시 움찔했지만, 무게만큼이나 위로가 되었다. 정말 큰 힘이 되었다. 엄마가 더 보고 싶다. 꼭 우리 엄마처럼 나를 다독여 준다. 고마움에 눈물이 더 왈칵! 이제 그만 울고 싶은데, 따뜻한 온기를 느끼니 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시키는 일은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그때는 말을 그렇게 안 들었을까?

아빠가 신발 정리하고 들어오라고 했던 잔소리, 엄마가 밥 먹으라고 했던 말, 누나가 과자 흘리고 다니지 말라고 했던 것까지…. 이제는 다 지킬 수 있을 텐데. 아니 이 모든 악몽의 원인인 휴대전화도 안 할 수 있는데….

4살 때부터 공기계까지 양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다녔지만,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예 휴대전화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살 수 있다. 집으로 갈 수만 있다면. 이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더 났다.


또, 얼마나 더 울었을까?

한참을 울고 났더니 아니, 이건 뭐지? 좀 전보다 앞이 조금 더 잘 보인다. 흐릿하던 눈앞이 이제는 제법 형태까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다행이다. 조금씩 더 보인다. 눈앞의 형태가 잘 보일수록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곰 두 마리뿐이었다. 곰이 되어 갇혀 있다는 현실만 더 확실해졌다. 과연 앞이 보이는 것이 좋은 것인가?


나를 챙겨주던 곰이 슬쩍슬쩍 엉덩이를 움직였다. 우리가 좁아서 덩치 큰 곰 셋이 앉아 있기도 힘든데, 발목 다친 까칠이 곰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혹여나 성질머리를 건드릴까 봐 걱정되어서 멈칫하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까칠이 곰이 도리어 차분했다. 아마도 배를 채워서 성격이 좀 죽은 것인지, 아니면 상황 파악을 끝낸 것인지. 착한 곰이 머리를 숙여서 까칠이 곰의 발목을 핥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살짝.

까칠이는 아픈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착한 곰을 밀쳐내지 않았다. 제법 아팠던 모양이다. 그리고 다시 두 번, 세 번 핥아줄수록 표정이 점차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위로와 걱정의 마음을 받아들였나 보다. 차츰 우리 안의 공기가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울고불고하던 나도 차분해지고, 성질부리며 벽을 차던 까칠이도 조용해졌다. 우리는 잠시 부른 배를 부여잡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로롱~’ 잠이 들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처음으로 마음이 편하게 잠이 들었다.

어디든 적응하지 못할 곳은 없구나. 만약 잠에서 깼을 때, 내 침대라면 하느님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제발요~



“와사사삭 툭”

아니, 이것은 대나무 소리! 자면서도 본능적으로 댓잎 소리와 향긋한 냄새에 온몸이 깨어났다. 아 밥이 추가되었구나. 자동으로 눈도 스르륵 떠졌다. 감사하게도 밝은 햇살이 보였고, 눈앞에 있는 두 곰의 형태도 살그머니 보였다. 완벽하게 보이지 않아도, 암흑이 아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다. 곰이 된 상태로 다행인지 불행인지 눈은 떠졌고, 속상하지만 내 침대로 돌아가는 기적은 벌어지지 않았다. 몸이 바뀌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어휴.


두 팔을 땅에 딛고 벽에 기대어 앉아 자연스럽게 댓잎을 먹기 시작했다. 뭐 어색함이 전혀 없을 정도로 편안하였다. 왜 댓잎 먹는 것이 편하지?

참.

내가 봐도 적응을 잘할 때가 있다. 처음 태권도 학원에 갔을 때도 그렇고, 피아노 학원에 갔을 때도 그렇다. 집 밖에 나가기 싫어서 울면서 떼를 쓰고 끌려간 학원이었지만, 학원 문을 넘어서는 순간 곧바로 분위기를 파악하고 원장님이 시키는 것만 했다. 그 덕에 어디를 가든 선생님들이 나를 좋아했다. 어린이집 다닐 때 그렇고, 할아버지 댁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이상하게 친구들하고는 그게 안 된다. 아니 안 된다기보다는 하기 싫다. 굳이 나에게 뭔가를 해주는 사람도 아닌데, 맞춰줄 필요를 못 느꼈다. 그래서 학교에 가면 내 주변에 친구들이 많지 않다. 사실 그게 더 편하다. 마음 통하는 친구 한 명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굳이 모든 친구와 잘 지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런 솔직한 이야기를 누구에게 한 적은 없지만, 그게 내 생각이다. 지금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으니까.


내가 가진 이 의외의 적응력 덕분에 어디서든 살아 남기가 쉽다. 집에서는 이 능력이 솟아나지 않는데, 집 밖에서는 제법 잘 솟아오른다. 어떤 때는 이런 파워E의 내 모습이 낯설기도 하다.

다섯 살 때 슈퍼마켓에 가서는

“이모가 사랑하는 동완이 왔어요~”

이렇게 인사하며 들어갔다고 한다. 사실 기억은 없는데, 슈퍼마켓 이모가 볼 때마다 이야기를 해주셔서….

지금도 이곳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 그러니 정신 차린 오늘부터는 파워E로 버전을 바꿔야 한다.

자 지금부터 적응력 발사!


다리를 다친 까칠이는 입맛이 없는지 여전히 누워 있다. 흐릿한 형태로 바닥에 누워 있는 까칠이를 구별할 수 있었다. 평소에 친한 친구가 아니면 관심이 없지만 지금은 특별한 상황이니, 먼저 다가가야 한다. 대나무 한 뭉치를 손으로 쥐어서 끌어다가 까칠이 앞에 던졌다.


“툭”

까칠이가 세모눈을 하고 째려보았다. 나는 두말 하지 않고 눈짓으로 어서 먹으라고 했다. 아직 목소리에는 적응이 어려워서, 굳이 다시 내가 내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다. 귀찮은 척하면서도 까칠이가 일어나 앉아, 내가 준 댓잎을 우적우적 먹기 시작했다. 생각 없이 골라준 것 같아도 나름 향긋한 향이 많이 나는 줄기로 골라 던져줬으니, 제법 맛이 있을 것이다. 이거 의외로 뿌듯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남한테 관심이 없는 척했지만, 사실 모든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을 다 도와주고 싶다. 그러나 13년 살면서 깨달은 것은, 좋은 마음으로 도와줘도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난번에 학교에서도 가방이 무거워 두 손으로 힘들게 드는 수현이를 달려가 도와줬다가 욕만 먹었다. 평소에 수현이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수현이한테는 자꾸 눈이 갔다. 예쁜 것도 같고, 귀여운 것도 같고. 그래서 수현이 일에는 무조건 달려가 도와줬더니, 어느 순간에 애들이 내가 수현이를 좋아한다는 헛소문을 냈고, 그 뒤로는 내가 옆에 가는 것도 아주 싫어했다. 그냥 수현이가 좋은 것인데 그것이 왜 싫은 것인지 모르겠다. 수현이가 지우개를 필요하다고 하면 내 것을 빌려주고 싶고, 체육 시간에 피구하면 공을 다 막아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날 수현이가 화내는 것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다. 나를 싫어할 수 있다니. 그래서 결심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기로. 남이 먼저 도와달라고 하고, 내가 도와줬을 때 “고마워”라는 말을 들을 때만 움직이기로.


그런데 지금은 동완이도 아니고, 학교도 아니며, 심지어 사람도 아니다. 그러니 그 결심은 잠시 넣어 두어도 좋을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현이가 싫다고 해도 내가 먼저


“도와줄까?”

하고 물은 다음에 도와줄걸. 남자애들 없는 피아노 학원에서는 수현이도 나와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괜히 친구들 눈치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그냥 먼저 도와줄 것을…. 엄청나게 후회가 된다.

지금 까칠이에게 했던 것처럼, 그냥 먼저 더 다가갈 것을.


이제는 친구들도 못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또 눈물이 난다. 아이참. 이제 울기 싫은데….

최소한 소리라도 내지 말고 울어야겠다. 이 눈물이 또 폭발이네. 더 요란스럽게 댓잎을 먹었다. 그 소리에 묻혀서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나를 지켜보던 착한 곰이 내 머리를 쓰담해 주었다. 걸리기 싫었는데 이 엄마 같은 곰에게는 다 들킨다. 뭐 처음 그 난리를 칠 때도 받아주었으니, 이런 모습도 이해해 주는 것이겠지? 또 마음껏 울었다. 최소한 까칠이에게만 들키지 않으면 성공이니까. 뭐 까칠이는 어제 다친 다리가 아픈지 나를 볼 힘도 없어 보인다. 이렇게 곰이 될 줄 알았다면 친구들에게도 파워E를 보여줄 것을…. 후회된다. 선생님과 어른들에게만 보였던 나의 모습을 친구들에게도 보여줬다면, 나는 인기가 많았을까?

눈물이 떨어지는 숫자만큼 댓잎을 더 와그작와그작 한가득 먹었다. 속상할 때는 먹는 것이 최고다. 뭔가 덜 슬퍼진다.



내가 사람일 때,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게임 하는 것이 그렇게 좋았는데, 지금 이 좁은 우리에 갇혀서 댓잎만 먹는 것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우리 밖으로 나가고 싶다. 아침에 아빠가 눈 많이 왔다고 눈사람 만들자고 할 때, 추워도 나가 볼 것을…. 왜 그렇게 침대만 좋았을까?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을 때, 실컷 뛰어다녔다면 이렇게 후회스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게임은 마음대로 끄고 켜고, 캐릭터도 바꾸고, 동선도 짜고, 전략도 세울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지금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누군가의 전략에 붙잡혀 있는 상황이 되고 보니 정말 괴롭다. 저 숲을 뛰어다니고 싶다.

얼마나 더 먹었을까?

배가 부르자 또 ‘도로롱’ 잠이 들었다.


아 이번에야말로 제발 돌아가라 몸아! 부디, 제발.

화,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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