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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원 Jan 08. 2024

나의 오랜 친구, 독서(2)

여러 겹의 생을 살아보는 일

 나에게도 독서 사춘기 같은 시기가 있었다. 한동안 인문학이나 과학 서적처럼 지식을 담고 있는 책만 쓸모가 있고 문학을 읽는 것이 시간 낭비라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가끔 우리 모임에 그 시기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신 분들이 종종 들어온다. 들어오자마자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시면서 문학은 안 읽는다고 하셨다. 뭐, 사실 특정 분야의 도서에 몰입해서 읽는 시기가 있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한창 불타오를 때 장작 열심히 넣어주는 것도 괜찮지 않나? 나만 해도 문학을 잘 읽지 않던 시기에 읽었던 인문학 서적들이 꽤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


 나를 문학이 무용하다고 느끼던 시기에서 벗어나게 해 준 건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의 에세이였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과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를 쓴 이도우 작가님의 에세이가 나왔다고 해서 냅다 주문하고 책을 기다렸다. 사랑 이야기면서 동시에 사람 이야기를 하는 작가님의 소설이 좋았고, 그런 따뜻한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이런 문장이 나왔다.

"책을 읽지 않고 살아도 아무런 무리가 없고 어떤 이들은 소설을 읽는 건 시간 낭비 같다고도 말하지만, 저는 소설을 읽지 않으면 한 겹의 인생을, 읽으면 여러 겹의 인생을 살게 될 것만 같습니다. 여러 겹의 생을 살아보는 일, 그건 세상에 나그네처럼 머물렀다 갈 사람들이 저마다 가질 수 있는 '나의 부피'일 겁니다." - 이도우,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중에서

 마치 나에게 들려주는 말 같았다. 그렇구나. 이것이 문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였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번의 생밖에 살지 못하니까. 그래서 소설을 통해 다른 이의 생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아닌 타인의 삶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다.


‘이해’란 가장 잘 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 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김소연, <마음사전> 중에서

 사실 나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나처럼 자기 자신마저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수두룩할 거라고.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에서

 하지만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해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그만둘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을, 소설을 읽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여러 겹의 인생을 살아볼 수 있게 하고, 조금 더 두터운 인생의 부피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게 하니까. 곱씹어 봐도 너무 멋진 표현이다. 누군가 그때의 나와 같은 시기를 지나고 있다면, 시간 아깝게 소설을 왜 읽냐고 묻는다면 꼭 이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책을 읽어봤자 다 까먹어서 읽기 싫다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다. 나도 사진 찍듯이 기억하는 재주가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해서 많은 것들을 금방 잊어가며 산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우리가 살면서 먹은 음식 전부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먹었을 때의 맛과 기분, 맛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내 취향이었는지 아닌지 정도만 기억에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먹었던 음식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 음식들은 내 피와 살이 되었을 테다. 나는 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내가 읽은 책과 문장들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여 내 영혼의 피와 살이 되고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뭐, 봤던 영화랑 드라마 내용도 잊어버리는데 책 내용을 좀 잊어버리면 어떤가. 그럴 수도 있지.


 사실 나는 독서 편식이 심한 편이고, 특히 최근까지도 세계문학을 잘 안 읽었다. 나중에 넓은 집에 이사 가면 주문 제작한 책장에 민음사 세계 문학전집을 순서대로 꽂아둘 거라는 소소한(?) 로망이 있지만, 세계문학은 왠지 멀게 느껴지고 손이 잘 안 갔다. 그런데 제목은 또 너무 익숙하다 보니 마치 읽었던 것 같은 착각을 하는 책도 많았다. 요즘에서야 민음사의 유튜브 채널을 보면서 세계 문학에 관심이 생겨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는데, 의외로 잘 읽히고 재미있어서 놀랐다. 무엇보다 표현이 너무 거침없어서 웃음이 날 때가 있는데, 그중 기억나는 것 몇 개를 꼽아보자면 이렇다.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그래 저렇게 건강하고 마음씨 고운 우리 예쁜 아가씨가 다 죽어가는 원숭이 새끼 같은 도련님에게 시집갈 줄 알아요?” (놀랍게도 가정부의 대사)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스트릭랜드는 마흔 안팎의 나이가 분명했는데, 그만한 나이를 먹은 사람이 연애 사건을 일으킨다는 것은 아무래도 추태만 같았다. (화자의 속마음이긴 하지만 정말 거침없다. 심지어 '이 자가 돌아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하기도 한다.)

 선생께서 조금만 더 나이가 들면 남의 일에는 간섭을 안 하시는 게 좋다는 걸 알게 될 거요. 미안하지만 고개를 조금만 왼쪽으로 돌려보시오. 나가는 문이 보일 테니. 안녕히 가시오. (꺼지라는 말을 이렇게 하다니)

 “아무래도 이런 격언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그대의 모든 행동이 보편적인 법칙에 맞을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격언 말입니다.”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돼먹지 않은 헛소리요.”
 “칸트가 한 말인데요.”
 “누가 말했든, 헛소리는 헛소리요.” (이런 식의 개그 코드들이 너무 웃겨서 한참 웃었다. 나만 웃긴가...?)

 혹시 나처럼 괜히 세계문학, 고전이라는 타이틀이 왠지 멀게만 느껴져서 손이 잘 안 갔다면, 겁먹지 말고 시도해 보시길. 생각보다 재미있답니다.


 자! 그럼, 이제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해볼까. 시기에 따라 바뀌기는 하지만 지금 가장 좋아하는 작가 세 명을 꼽으라면 먼저 마거릿 애트우드(어떻게 이런 스토리를!), 매들린 밀러(어떻게 이런 묘사를!), 은희경(어떻게 이런 문장을!) 작가이다. 특히 매들린 밀러 작가의 <아킬레우스의 노래>,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 마거릿 애트우드 작가의 <시녀 이야기>와 그 속편인 <증언들>은 꼭 읽어보시면 좋겠다. 매들린 밀러 작가님 책은 지금 출간된 게 세 권밖에 없는데 다 읽어서 읽을 게 없. 사는 동안 많이 버시고 책도 많이 써주시길 바란다. <시녀 이야기>와 <증언들>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가 ‘아! 이건 사야 해!’ 싶어서 다 읽고 나서 소장용으로 구입했다. 은희경 작가님의 <새의 선물>은 언젠가 필사에 도전하려고 한다.


 얼마 전 본 다큐멘터리에서 학생들의 문해력이 자꾸만 떨어지고, 성인들 역시 책을 일 년에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이 2021년 기준 52.5%라고 했다. 지금은 아마 그보다 더 많을 것이다. 문을 닫는 서점들이 자꾸만 늘어가고, 어쩌면 종이책이 정말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릴지 걱정도 된다. 책을 읽든 안 읽든 일단 사고 보는 나 같은 호더들의 존재가 출판사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책은 읽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서 읽는 거라고 김영하 작가님이 그러셨으니 사두면 언젠가는 읽을 거다. 아마도….

이것 봐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니까

 숏폼과 도파민에 중독된 세상에서 긴 시간을 들여 활자로 그려진 세상을 상상하면서 책을 읽는 시간이 일종의 낭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천천히, 읽고 배우는 걸 멈추지 않는 삶을 사는 게 내 일생의 목표이다. 올해는 꼭 산 책 보다 읽은 책이 더 많아서, 호더보다는 리더로 살 수 있기를!




독서를 하며 알게 된 점

어쩌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


독서,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모든 사람들


사진: UnsplashBlaz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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