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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원 Jan 22. 2024

불안과 불완전함, 여행(2)

완벽했던 순간보다 오래가는 불완전한 순간들

 유럽 여행에서 배운 가장 큰 한 가지를 꼽으라면, 현재의 불편함을 감수하며 과거를 보존하는 삶의 방식이었다. 물론 나라마다 그들이 겪은 역사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겠지만 '빨리빨리'와 '신축'을 선호하는 우리나라와 너무도 달라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건물을 보존하기 위해 난방 시설을 설치하지 않고, 유적지를 보호하기 위해 트램(tram)의 코스는 짧게 만들고, 지하 주차장도 만들지 않으며, 비가 오면 넘어지기도 쉽고 차도 덜컹거려서 불편한 돌바닥을 지금까지 보존하는 사람들. 교통 체증과 주차 공간 부족에 시달려도 그 정도의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그런 마음. 덕분에 지금도 우리는 괴테와 바그너가 자주 찾던 베네치아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고, 그들이 걷던 거리의 풍경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엄마 아빠가 당신들보다 내게 먼저 보여주고 싶었던 게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직접 와서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었을 경험들. 힘들었지만 그 여행이 여러모로 기억에 오래 남은 건 사실이다. 부담감과 압박감을 가졌던 만큼 열심히 보면서 느낀 점을 노트에 적고, 갔다 와서 당시 열심히 하던 블로그에 여행기를 사진과 함께 기록으로 남겨놓기까지 했었으니. 아무튼 그렇게 내 첫 해외여행이 막을 내렸고 정확히 2년 후 부모님은 나와 동생이 다녀온 것과 똑같은 패키지여행을 떠나셨는데, 돌아오자마자 동생을 데리고 다니느라 힘들었겠다며 나에게 매우 미안해하셨다.


 2022년, 거의 10년 만에 다시 비행기를 타게 됐다. 수학여행 이후 처음으로 제주도에 갔다. 서른이 넘어서야 어떤 부담감 없이 떠난 여행은 내가 여행을 싫어했었나 싶을 정도로 꽤 즐거웠다. 여행 내내 먹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였고, 애월에 있는 숙소에 머물면서도 3일 내내 노을이라곤 코빼기도 볼 수 없었지만, 제주도에만 먹을 수 있다는 도넛과 음료도 맛있었고, 남동생은 이제 내가 계속 챙겨야 할 정도로 어리지 않았으며 이제는 눈치껏 내 짐을 대신 들어줄 만큼 듬직해졌다. 많은 것이 달라졌고 변하지 않은 건 여전히 엉망인 동생의 사진 찍는 실력 정도일까. 비행기 소음은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나에게는 이제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는 이어폰이 생겼고, 나는 내 눈꺼풀이 허락하는 한 기내에서 얼마든지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여행을 다녀와서 부모님께 이번 가족여행 때 찍은 사진으로 포토북을 만들어드렸다. 잘 나온 사진 몇 장을 인화했는데, 핸드폰 카메라나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게 된 이후로 사진을 인화해 본 적이 없어서 반질반질한 실물 사진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엄마가 너무 좋아하면서 가족여행 갈 때마다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노력… 해볼게!


 여행을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만큼 자주 가지는 못하는 아빠는 매일 거실에서 여행 TV 프로그램이나 여행 유튜버의 영상을 본다. 가끔 옆에서 같이 보고 있으면 저 여행지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지만, 저기까지 비행기를 여러 번 갈아타면서까지 갈 자신은 없다. 하지만 만약 순간이동을 할 수 있게 되어 비행기를 타지 않고 여행을 갈 수 있게 되더라도,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여행 대신 순간이동을 선택할 것 같지는 않다. 전자책이 나와도 종이책을 더 좋아하고, 이메일과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어도 손으로 쓴 편지를 더 좋아하는, 빠르고 간편한 방법이 생겼음에도 약간의 불편함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고, 나는 지금도 아이유의 ‘금요일에 만나요’를 들을 때마다 영국행 비행기에서 mp3 플레이어로 노래를 듣던 20대 초반의 나로 돌아간 기분이 드는데 어떻게 목적지를 향하는 그 순간을 생략할 수 있을까. 여행의 기억은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가 시작되고, 여행은 목적지에서보다 오가는 도중에 일어나고 벌어지는 일들이 오히려 더 생생한걸.


 돌이켜보면 여행이 끝난 후 더 오래 기억에 남은 건 완벽했던 순간보다는 불완전했던 순간들이었다. 아무래도 내내 즐거웠던 기억보다는 조금 고생하고, 어설프게 대처하고, 실수하고, 아쉬웠던 기억의 유효기간이 더 긴 모양이다. 융프라우에서 화장실에 갔다가 나오지 않는 동생 때문에 열차를 놓칠까 봐 발을 동동 굴렀던 기억, 숙소에 돌아와 카메라를 확인해 보니 동생이 내 사진을 어처구니없게 찍어놓아 허탈했던 기억, 베네치아에서 갑자기 배가 아프다던 동생 때문에 가까운 가게에서 젤라또를 샀는데 화장실이 없는 가게여서 난감한 와중에 젤라또가 너무 맛있어서 한 개씩 더 사 사서 양손에 들고 화장실을 찾아다녔던 기억, 여행 내내 비구름 때문에 에펠탑이 제대로 보이지 않더니 떠날 때가 되어서야 파랗게 개이기 시작하던 파리의 하늘, 체리가 들어있다고 해서 샀는데 술에 절인 체리가 들어있던 초콜릿(*나는 술을 못 먹고 동생은 당시 미성년자였음), 끝내주게 맛있었던 음식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내 입맛에는 조금 짜게 느껴졌던 마르게리타 피자와 1분만 더 삶았으면 좋았을 것 같은 파스타였으니까.


 지금도 내 사전에서 ‘여행’과 가장 가까이 있는 단어는 '불안'이다. 여행을 준비할 때면 항상 설렘보다 걱정이 나를 먼저 찾아온다. 비행기 사고보다 자동차 사고로 죽을 확률이 높다는 걸 알고 있어도 이륙과 착륙 때는 여전히 겁이 나고, 공항은 어릴 때보다 키도 마음도 커진 지금의 나에게도 너무 넓고, 혹시 무슨 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두렵다. 하지만 이제는 '여권을 잃어버리면 어쩌지?', '내가 주민등록증을 챙겼던가?', '숙소에 두고 나온 물건은 없겠지?', '이 박물관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와서 돈을 훔치는 열정적인 소매치기들이 많다던데 혹시 내 지갑에 관심을 가지지는 않겠지?', ‘갑자기 회사에 무슨 일이 생겨서 연락이 오면 어쩌지?’ 하는 불안한 마음까지도 내 여행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여전히 여행보다는 집에서 노는 걸 더 좋아하지만, 꾸준히 운동하며 내 몸뚱이에는 근육과 체력이 붙었고, 이제는 내가 직접 번 돈으로 여행을 갈 수 있을 만큼 모아놓은 돈도 있다. 나의 여행은 불안함과 불완전함을 조금씩 포용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여행’이라는 단어 옆에 어느샌가 '즐거움'이라는 단어가 다가와 있다. 이러한 변화가 나쁘지 않다.



여행을 하며 알게 된 점

모든 사람에게 여행이 즐거운 취미는 아니라는 것

다시는 엄마의 아들과 단둘이 여행 가지 않을 것

다양한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


여행,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분

체력이 좋은 분

새로운 문화를 보고 배우는 걸 좋아하는 분



사진: UnsplashRana Sawal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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