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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원 Jan 29. 2024

난 당신의 고요함이, 식물 관찰(1)

콩콩팥팥과 벚꽃 엔딩

 최근 본 예능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면 바로 tvN에서 방영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이하 콩콩팥팥)>이다. 김우빈, 김기방, 도경수, 이광수 이렇게 실제 친구인 출연자 네 명이 강원도 인제에 있는 작은 밭을 함께 경작하는 내용이다. 최소한의 제작진과 장비로 촬영하다 보니 카메라 무빙이 친구가 옆에서 찍어준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출연자들이 뛰어다닐 때마다 화면이 심하게 흔들려서 어지러울 때도 있는데, 그게 오히려 더 친근한 느낌을 주었다. 초보 농사꾼들이 대차게 시작한 밭을 전부 갈아엎기도 하고, 어설프고 서툴게 농사를 짓지만 그럼에도 식물들은 열심히 자라났다. 늦게 심은 수박은 테니스공보다 조금 더 큰 귀여운 크기로 열렸고, 파프리카는 키가 작아도 실하게 달렸고, 무섭게 자라난 들깨는 깻잎 숲을 이루었다. 직접 키운 재료로 요리를 해 먹고, 직접 재배한 들깨로 짠 들기름을 맛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걸 보면서 이유 모르게 마음이 따뜻하게 차올랐다.


 아무리 봐도 먼 나라의 어느 부족이 만든 주술적 의미가 있는 듯한 모양새의 꽃밭을 만들어놓고 자기들끼리 예쁘다고 호들갑을 떨며 좋아하는 것 역시 너무 웃기고 귀여웠다. 나는 약간 골 때리면서 귀여운 사람들이 좋다. (여기서 포인트는 귀여워야 한다는 점. 골만 때리면… 곤란하다.) 아무튼 9화로 끝나버린 게 아쉬울 정도로 간만에 재미있게 본 힐링 프로그램이었다. 나 역시 가족 중에 조그마한 밭에 농사를 짓는 사람이 몇 명 있었던 터라 어렸을 때부터 고구마, 배추, 들깨, 무, 가지, 고추, 옥수수, 콩, 상추, 깻잎 등 여러 작물을 이것저것 많이 수확해 봤다. 콩콩팥팥에서는 들깨를 유쾌하게 털지만, 나는 예전에 할아버지가 심었던 들깨를 털고 몸살이 나서 드러누웠다. 실제 농사는 콩콩팥팥처럼 웃기고 따뜻한 예능이 아니라, 덥고 힘들어서 웃음도 안 나는 다큐에 가깝다. 그러니 혹시 나중에 농사를 짓고 싶냐고 누군가 물으면 나는 정색하고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예능은 예능이고, 농사는 화면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다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농사는 내 인생에 없기를 바라지만, 나는 식물 자체는 매우 좋아한다. 재배하는데 소질과 흥미가 없을 뿐 식물을 관찰하는 건 좋다. 수목원이나 식물원도 좋아하고, 아파트 단지나 길가에 핀 식물을 보면서 저건 무슨 꽃일까 궁금해서 가던 길을 멈추고 찾아보기도 한다. 예전에는 인터넷에 ‘보라색 꽃’ 이런 식으로 서울에서 김 서방 찾듯이 검색해 보고는 했는데, 요즘은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어서 식물들의 이름을 찾을 수 있는 기능들이 점점 생겨나서 아주 좋다. 엄마는 내가 어릴 적에 집에 있던 식물도감에 나오는 식물의 이름을 전부 외운 걸 보고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고 한다. 아마 공룡 이름을 줄줄 외우는 아이들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단지 나는 그 대상이 공룡이 아니라 식물이었을 뿐. 슬프게도, 자신이 천재를 낳은 게 아닐까 했던 것은 엄마의 오해였다는 걸 내가 30여 년간 착실하게 증명해 내고 있다. 그리고 그때 줄줄 외우던 식물들의 이름도 지금은 금낭화, 은방울꽃, 할미꽃, 애기똥풀처럼 인상 깊은 몇 가지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언제부터 식물을 보러 다니는 게 좋아지기 시작했나 생각해 보니 아마도 대학생 때부터였던 것 같다. 걸어 다니는 시간도 아까워서 바닥만 보면서 뛰듯이 걷던 고등학생 때는 꽃이 예쁜 것에 관심을 가질 만큼 여유롭지도 않았고 꽃이 예쁜 줄도 몰랐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내 의지로 꽃을 보러 나갔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벚꽃이 예쁘기로 꽤 유명해서 봄마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외부인들까지 넘쳐났다. 그리고 그때 마침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엔딩이라는 노래가 나왔으니, 대학 생활 내내 벚꽃 철마다 얼마나 난리였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벚꽃의 꽃말이 중간고사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봄바람이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지는 거리를 혼자 걸어 다녔다. 목적지 없이 그저 꽃나무들이 만개한 거리를 천천히 거닐다가 예쁜 장소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공부하러 도서관에 가는 길에 피어있는 꽃들만 봐도 기분이 좋았고, 점심을 먹으러 잠깐 나오는 짧은 길도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대학교 때 식물과 관련된 수업을 듣기도 했고, 식물 실험실에서 아르바이트도 해보았다. 교내 자연사박물관에서도 일해보고 싶었는데 경쟁률이 꽤 치열해서 식물 실험실로 들어갔는데 혼자서 조용히 사부작거리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는 오히려 그쪽이 더 잘 맞았다. 실험실에서 내가 한 일은 보존 식물 표본을 만드는 일이었다. 대학원생들과 박사님들이 산과 들에서 채집해 온 식물들이 기계 안에서 잘 마르고 나면, 건조된 식물을 두꺼운 종이 위에 잎과 꽃과 열매 등이 잘 보이도록 바스러지지 않게 주의해서 붙다. 종자(씨앗)가 있으면 봉투에 담아서 옆에 붙여두었다. 다 만들면 식물의 학명에 따라서 국화과면 국화과, 꿀풀과면 꿀풀과끼리 모빌랙에 차곡차곡 넣어두었다. 한때는 식물학자가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일단 고정 수입이 있어야 했고, 불확실한 미래에 남은 인생을 걸 만큼 용감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과학을 직업으로 삼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누가 먹고살 걱정 없을 만큼의 돈을 주면서 연구하라고 하면 덥석 수락했을지도 모르겠다. 교수님이 과학이 반드시 직업일 필요는 없다고, 수단이 될 수도 있는 거라고 하셨던 말을 기억한다. 직업으로 삼지는 않았어도 나는 여전히 과학을 좋아하고, 과학은 내 삶의 수단으로 잘 쓰이고 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생물분류기사(식물) 자격증을 따고 싶다. 딱히 어딘가에 쓰려는 건 아니고, 그냥 식물 공부를 다시 해보고 싶어서.



사진: UnsplashCapture @Moments

제목: 오왠 - 난 당신의 고요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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