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그런 거야
캠퍼스 저 너머 산자락 위로 달과 별이 제자리를 잡으면, 나도 하루를 마무리한다.
연구실 불을 끄고 건물을 나서려는데, 문득 군 시절 야외 일과를 마치고 내무실로 돌아가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흥얼거리던 노래가 입가에 맴돈다.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요즘 나는 이렇게 바꿔 부른다.
"학문으로 충만한 하루를~ F1 드라이빙으로 마무리~"
학교를 빠져나와 5분쯤 지나 고속화도로 입구에 다다른다. 밤 9시를 넘긴 시각, 아침 출근 시간에 꼬리를 물던 차량들은 자취를 감췄고, 도로는 한적하다. 운이 좋은 날이면 단 한 번의 막힘 없이 집까지 곧장 내달릴 수 있다.
진입 램프를 지나 쭉 뻗은 직선 구간, 휙휙 바람을 가르는 차량들이 간간히 지나쳐간다. 드문드문 늘어 선 가로등 불빛만이 어두침침한 도로 위를 어슴푸레 밝힌다.
과속 단속 카메라를 지나 오른쪽으로 완만하게 휘어지는 곡선 구간에 접어들었다. 라디오에서는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군) 관련 속보가 연신 쏟아진다. 얼마 전, 지인 중에도 부모님 칠순 해외여행을 취소한 사람이 있었다. 사태가 쉽게 가라앉지 않을 모양이다.
CD 버튼을 누르자 셀린 디옹의 <That's the way it is>가 흘러나온다. 창문을 조금 내렸다. 6월 초여름의 밤바람이 차 안으로 스며들어 부드럽게 피부를 휘감다 지나간다. 셀린 디옹의 청명한 허밍으로 시작하는 노래가 온몸을 기분 좋은 전율로 흔든다.
딱 그 순간.
전방 약 2~30m 앞, 차선 중앙에 뭔가 작은 상자 같은 물체가 보였다. 하필 커브 구간, 주변에 가로등조차 없는 그늘진 지점이다. '뭐지? 도로 위에..., 내가 잘못 본 건가?'
평소 다니던 익숙한 길이다 보니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헛 것이겠거니. 눈이 피곤한 탓이겠거니. 설마 도로 위에 저런 게 있을 리 없지. 확실치 않으면 좋은 쪽으로 믿고 싶은, 근거 없는 “긍정확증편향" 같은 감정이 나를 붙들었다. 노래의 후렴구가 시작된다.
When you want it the most. there's no easy way out.(간절히 원할 때 쉬운 길은 없어요.)
하지만 망설이는 사이, 물체는 점점 가까워졌다. 어느새 자동차 보닛 바로 앞.
'피해야 하나? 아니면, 그대로 밀고 나가야 하나?'
백미러를 볼 겨를도 없었다. 이 시간대 도로에는 과속 차량이 있을 수 있다. 섣불리 차선을 바꾸었다간 더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When you're ready to go and your heart's left in doubt.(떠날 준비가 되어도 마음 한구석엔 의심이 들기 마련이죠.)
나는 결국 그대로 밀고 나갔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종이박스 이거나 빈 깡통이길...'
순간, 보닛 앞 물체가 사라졌다.
곧이어 "꽈앙", 조수석 타이어 부근의 충격이 차체로 전해졌다.
'튕겨 나간 건가?'
눈앞엔 짙은 아스팔트와 어둠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차는 여전히 관성으로 미끄러진다.
물체는 차량 하부로 빨려 들어갔다
Don't give up on your faith.(믿음을 포기하지 말아요.)
"탕!" "타탕!" "탕탕탕!" "타타타탕!"
사각형 물체, 차량의 하부, 네 바퀴, 아스팔트 바닥이 복잡한 기하학을 만들어냈다. 단속적인 충격음마다, 구분되는 진동이 핸들과 운전석, 그리고 차제에 퍼졌다.
'아, 이거 X 됐구나.'
자책할 겨를도 없이 억겁의 시간이 흘렀다.
Love comes to those who believe it. (사랑은 믿는 이에게 찾아오니까요.)
백미러 너머, 쓰다 만 철제 페인트 통 하나가 몇 번 튀어 오르더니 도로 위에 멈춰 섰다. 고속화도로 한복판, 차를 멈출 수는 없었다. 그리고,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차는 계속 달렸다. 한강변 도로에 접어들자 가드레일과 조경수가 휙휙 스쳐 지나간다. 오른편엔 아파트 단지 불빛이 한강 수면 위에서 반짝인다. 노래도, 마침, 끝났다.
And that's the way it is.(그게 바로 삶이라는 거예요.)
창문을 닫고, 오디오도 껐다.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어휴, 조심 좀 하지. 이게 뭐야...'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차를 살펴보았다. 겉보기에는 멀쩡했다. 차량 하부에도 특별한 누유나 이상 증상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학교 근처 정비소에 들렀다. 정비사가 말했다.
"로워 암(Lower Arm)이 심하게 손상됐네요. 연결 부위가 금이 가고 깨졌습니다."
고개를 갸웃하는 정비사에게 어젯밤 상황을 설명하자, 그가 말했다.
"진짜 운 좋으셨네요. 도로 위에 떨어진 물건은 진짜 위험해요. 제 친구도 예전에 고철 덩어리에 차가 전복된 적이 있었습니다."
정품은 부담되어 중고 부품으로 교체했다. 정비소 사장님께 부탁해 전반적인 점검도 함께 받았다. 수리비는 총 50만 원.
이전 같으면 큰돈이 아니다. 하지만 박사과정에 들어선 뒤, 나는 줄곧 '긴축 모드'를 유지해 왔다. "드는 놈은 몰라도, 나는 놈은 안다." 예기치 못한 지출, 바로 실감됐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다.
차는 멀쩡하고, 나도 무사하다.
'50만 원쯤이야, 그냥 액땜으로 치자.' 호기롭게 툭 털고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정비사의 말처럼,
어젯밤, 그 물체가 만약 고철 덩어리였거나, 내용물이 가득 찬 다른 어떤 것이었다면? 나는 지금 여기 없을지도 모른다.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떠올랐다.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새집에서 커튼을 다는 시범을 보이다 떨어진 후, 병을 얻고 죽는다. 그 어이없는 사고 하나가 그의 삶을 그대로 삭제해 버렸다.
그가 죽은 나이, 마흔다섯. 지금의 나와 같다.
'그래, 맞아. 어젠 억세게 운이 좋았어, 이건 나를 향한 신의 가호(加護)이자 뜻이야. 앞으로 내 인생엔 멋진 일들만이 가득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