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를 시작하며
2학기 개강 첫날밤.
온갖 수학 공식들이 토네이도 속 파편처럼 날아다녔다.
∫, ∂, Σ...,
낯선 수학 기호들이 허공을 가르며 회전하고, 알 수 없는 방정식들이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이게, 대체 뭘 뜻하는 거지?'
끔찍할 정도로 또렷한 꿈.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릿한 어디에선가 나는 끙끙대며 허우적거렸다. 눈앞의 가상 칠판 위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춤을 췄고, 온 힘을 다해 나는 해답을 쫓았다.
그러다 알람 소리가 들렸다.
아침 6시, 나의 의식이 다른 세계로 열리는 시간.
수식과 그간 쌓은 풀이등, 손에서 모래가 빠져나가듯 그 세계는 사라졌다. 남은 건 밤새 뭔가에 끌려 다닌 듯한 피로감, 그리고 뻣뻣한 목과 어깨뿐이다.
'성공적으로 첫 학기를 마쳤으니, 이번 학기쯤이야.'
생각은 긍정적으로 노력했지만, 몸은 다르게 반응했다.
이번 학기엔 전공 두 과목, 그리고 다변량분석(Multivariate analysis)까지 수강한다. 다변량분석은 통계학과 전공과목으로, AI 공부 관련한 수학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선택했다. 내심 걱정이 앞섰다.
'내가 잘 따라갈 수 있을까. 괜히 남의 전공에서 바보 취급 당하는 거 아냐?'
게다가 MIS 과목 교수는 아넷(Annette) 교수님.
이스라엘계 미국인으로 IT 보안 분야 권위자라고 한다. 대학원생을 마치 초등학생 대하듯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외국인 교수님? 대체 어떤 수업을 하시는 분일까?'
사실 첫 학기는 '워밍업'이라는 마음으로 임했다. 직장인에서 학생으로의 신분 전환은, 20년 만의 급작스러운 변화였다. 무리하면 견뎌내지 못할까 봐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이번 학기부터는 진짜다. 수업은 연구 주제와 맞춰 신청했다. 올해 안으로 논문 초안도 완성할 계획이다. 월 1,000만 원의 기회비용이 드는 만큼, 그에 걸맞은 성과로 증명해야 한다. 지난 학기엔 운 좋게 전 과목 A+을 받았다. 이번에도 연이어 그리 되면 좋겠지만, 아마 만만치 않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일종의 매듭을 지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앓으면서 넘어가고 있었다.
늘 그렇듯, 새로운 시기가 되면 새로운 근심거리가 스멀스멀 스며든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이 길이 맞는 길일까?'
불혹을 넘긴 나이지만, 사는 걱정은 여전하고 삶에 대한 답은 미궁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SNS에서 한 문장을 마주쳤다. 나는 그 짧은 구절에 사로잡혔다.
시각, 후각, 촉각, 미각, 청각, 지성 -
나는 내 연장들을 거둔다.
밤이 되었고, 하루의 일은 끝났다.
나는 두더지처럼 내 집으로, 땅으로 돌아간다.
지쳤거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피곤하지 않다.
하지만 날이 저물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 1957> -
바로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 두더지가 바로 지금의 나라는 것을.
삶 속에서 책을 파고, 논문으로 파고, 연구를 파며 살아가는 한 마리 두더지처럼 말이다.
혹시 이 고백이 누군가에겐 불편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표현은 자유 아닌가. 조르바처럼, 자유롭게.
3시간짜리 연강 수업을 듣고 돌아오면 진이 빠진다. 늦은 오후, 연구실 의자에 기대 '딱 10분만 쉬자'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가 나왔다.
그 인간이.
지금 나를 이 지경으로 몰아 놓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살아가는 그놈.
"다 너 때문이야!!"
꿈속에서 나는 그의 멱살을 잡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주먹을 휘 두려는 순간,
깨어났다.
손이 떨고 있었다.
현실이었다.
아무 말없이 세면대로 향했다.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숨을 고른 뒤, 편지를 썼다. 수신인은 중학생 두 아들. 실은 그 편지, 두 번째 학기에 임하는 '나 자신'에게 보내는 일종의 다짐 같은 것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들에게,
아빠와 너희 모두, 이제 2학기를 시작했구나.
캠퍼스에는 다양한 인종의 학생들이 환하게 웃으며 거닐고,
영어, 중국어, 한국어, 태국어 등
수많은 언어가 뒤섞여 들려오는구나.
아빠는 박사과정 첫 학기는 무사히 마쳤고,
이제 이제 두 번째 학기를 잘 보내고 있어.
아빠는 요즘 카잔차키스의 글처럼 살아.
매일매일 땅을 파는 두더지처럼 말이야.
나는 지적 연장들을 거두고, 연구실을 나선다.
지쳐서가 아니라, 단지 날이 저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내일, 새로워진 연장과 기운으로,
두더지처럼 묵묵히 글을 읽고, 연구라는 땅을 파고든다.
직장 생활할 때보다 마음은 더 힘들지만,
그래도 아빠는 지금,
아빠가 선택한 삶이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단다.
아들들아, 아빠를 응원해 다오.
아들들아,
너희는 결코 삶을 두려워하지 말거라.
세상이 너희 바람대로 흘러가진 않을 거야.
그렇더라도 그것이 실패라는 뜻은 아니란다.
결과, 즉, '성공'은 신의 영역이고,
도전은 인간의 몫이란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자신의 할 바를 하면 된단다.
그러니, 아들들아,
너희 삶 속에서 가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거든 기꺼이 도전하거라.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후회하지 말고,
호기심과 도전으로 가득 찬 인생을 인생을 살기 바란다.
아빠가,
2015년 9월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