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결과 draft
2016년 2월 어느 화요일 오후, 캠퍼스엔 소복이 눈이 내려앉았다.
지난봄부터 매달려온 SLR(Systematic Literature Reivew) 연구의 첫 단계, '데이터 추출' 파트를 막 끝낸 참이었다. 정제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프로그램을 돌려 뽑아낸 결론은.... 상식에 가까운 평범한 결과였다.
이게 논문이 될 수 있을까?
근 8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달렸는데, 돌아온 건 참담한 결과였다.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목요일은 지도교수와의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손에 잡지 못한 채 나는 고민만 했다.
교수님께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지?
연구 제안을 흔쾌히 받아 주었던 장 박사님도 떠올랐다. 근 6개월 동안 주말마다 시간을 내어 진심으로 도와주신 분이었다. 괜히 나 때문에 시간만 허비하셨구나. 죄송함에 마음이 짓눌렀다.
어릴 적 살던 시골 어촌 마을에는 마을입구부터 신작로까지 종종 플랭카드가 걸렸다. 개천에 용이 났다는 신호였다.
"OO리 OO 양장점 네 큰 아들 OOO 서울대 합격",
"OO초•중•고 출신 OOO 사법시험 최종 합격",
"경사 났네! OO 마을 자랑! OO댁 장손 OOO 수협 차장 승진" 등.
그런 건 늘 남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집 맞은편 친척 집에서 경사가 났다.
"경축! 미도사 큰 아들, 김종도 서울대 법대 합격"
사거리에 쫘악 내걸린 현수막 아래 삼삼오오 모인 마을 사람들은 종도 형네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국민(초등)학교 3학년이던 나는, 주변 사람들의 흥분된 반응으로 종도 형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방정맞은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지고 전 부치는 냄새가 골목을 메웠다. 막걸리 주전자가 여기저기 날아다녔고, 잔마다 술은 넘치도록 채워졌다. 고함치고 웃고 왁자지껄 떠드는 잔치는 밤새 이어졌다.
얼마 뒤 봄이 오고, 종도 형은 유학을 떠났다. 어촌 마을엔 별다른 뉴스거리가 없다. 그날이 그날인 곳. 용이 떠난 개천엔 빛바랜 현수막만 바람에 펄럭였다.
나는 종도 형네 가족들에게 늘 하인처럼 취급받았다. 놀림과 심부름, 때로는 짓궂은 괴롭힘도 당했다. 종도 형이 서울대에 간 뒤로 괄시는 더 심해졌다. 요즘은 마치 나를 지렁이 대하듯 했다. 아니꼬웠다.
종도 형이 용이 되면, 그 가족들도 모두 용이 되는 건가?
어느 날, 방과 후 야구를 하러 가던 길이었다.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명멍아! 명멍아!"(내 이름과 개 짖는 소리를 섞어 부르는 별명)
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 미도사 가게에서 일하던 이모부 할아버지가 손짓하고 있었다.
"명멍아, 저 위 언덕배기 약국에 가서 판콜 하나 사 오느라. 네가 얼마나 빨라졌는지 이 할애비가 시간 한번 재어보마."
가게 안에는 한 살 터울인 영지 누나가 눈깔사탕을 빨며 인형놀이에 한창이었다. 영지 누나도 있는데, 왜 꼭 나야...? 친구들과 야구를 하기로 한 시간이 다가오니 마음이 급했다. 하지만, 기록을 단축하겠다는 생각으로 콧물을 휘날리며 그대로 언덕으로 내달렸다. 판콜을 받아 든 이모부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말씀하셨다.
"우리 명멍이, 참 잘했어요."
그때 나는 멍멍이 었다. 용도, 이무기도 아닌.
1년 뒤, 또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종도 형의 두 살 아래인 경도 형도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 결심이자 오기가 자라났다.
‘그래, 나도 종도, 경도 형처럼 용이 되어서 플랭카드에 이름이 걸리는 사람이 될 거야. 못 되면, 적어도 이무기 정도라도 될 거야.'
그런데 세상 일, 참 모를 일이다. 초등학교 6학년 되던 해, 나는 갑작스레 서울로 전학을 오게 되었다. 플랭카드에 이름을 걸어 볼 기회조차 없이 말이다.
어릴 적 새긴 그 다짐은 이후 내 삶을 이끄는 기준이 되었다. 인생의 단계나 고비마다 나는 용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못해도 이무기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자존감으로 버텼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40대 중반에 박사과정을 시작하는 처지가 되었다. 당연히 이곳에서도, 나는 용이 되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박사과정 학생에게 논문은 거의 모든 것이다. 논문이 없으면 박사 학위도, 교수라는 꿈도 모두 몽상에 불과하다. 안 그래도 나는 40대 중반이라는 나이 핸디캡까지 있는 터였다. 수업과 연구조교 업무를 제외한 모든 시간을 논문에 쏟았다. 그런데 근 1년 만에 보게 된 결과가 이 모양이라니,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맞아, 난 원래 용은커녕 이무기도 안 되는 놈이야. 그냥 지렁이, 멍멍이야.
“작성 중인 논문 완성”은 2016년 새해 목표 중 하나였다. 벌써 목표 하나가 날아가 버렸다. 도서관에서 구하기 어려운 논문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으면 기뻐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내 처지가 서글펐다.
이렇게 애쓰는데, 왜 하늘은 나를 이렇게나 돕지 않는 걸까?
목요일, 연구실 미팅 끝난 후 허 교수를 만났다. 교수님은 내 연구 결과를 한참 들여다보시더니 의외의 말을 꺼냈다.
"Looks done well."
순간, 상처받을까 봐 위로하려고 일부러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더니 한 마디를 더 이어 말하셨다.
"IEEE 저널에서 K연구자의 OOO 논문을 참고해서 초안을 작성해 봐라."
연구실로 돌아오며 되뇌었다. 소용없는 일이겠지.
그러나, 찬찬히 논문을 읽는 그 순간, 불현듯 시야가 넓어지고 선명해지고 밝아졌다. 가슴이 나에게 말했다.
“너는 immature(미성숙)한 사람이었어.”
미세하지만 분명히 보였다. 그동안 내가 보지 못했던 내 연구의 가치가.
이날, 나는 무언가를 'in a delicate manner(섬세하게)'에서 'in a more delicate manner(더 섬세하게)' 볼 수 있는 안목(眼目)을 갖게 되었다.
그 느닷없이 순간,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시는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 시편 92장 5절 -
2월 마지막 주, 큰 아들이 중학교를 졸업했다. 교실에서 간단한 졸업 행사가 열렸다. 스크린에는 아이들의 영상 편지가 하나씩 띄워졌다. 큰 아들도 친구들에게 영상 편지를 보냈다.
"고등학교 가도 잘 지낼 거야."
"일 년 동안 정말 고마웠다."
졸업식이 끝나고, 우리는 동네 중국집으로 향했다. 우리 집의 졸업식 후 식사는 언제나 중국집이다. 연분홍색 반코트를 걸친 아내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여보, 내가 생활비라도 좀 벌어보려고 주식을 했다가..., 200만 원을 잃었어. 미안해."
"내가 더 열심히 공부해서, 잃어버린 돈도 회복하고, 나중에 근사한 계획도 해 볼게."
아내는 짧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러더니, 물었다.
"종도 형네 이모부 할아버지 돌아가셨다며? 아버님 장례식에 다녀오셨대?"
"응. 그런데 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종도 형도, 경도 형도 아무도 안 왔대. 같이 사는 영지만 장례식장에 있더래. 두 형 모두 사법고시에 계속 떨어지고 장가도 못 가서.. 지금은 어디 사는지도 모른대"
야심 차게 시작한 논문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사람은 누구나 꿈을 꾼다. 용이 되려 하고, 못해도 이무기라도 되려 애쓴다. 그것이 꿈을 향한 도약인지, 아니면 제자리 뛰기인지 아무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