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도

by 명연재

크리스마스이브 새벽, 살며시 침대를 빠져나와 거실 베란다로 향했다. 문을 여는 순간, 베란다를 가득 메운 냉기가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다.


이마를 차디찬 바닥에 대고 양팔로 머리를 감쌌다. 뜨겁고 거친 숨이 바닥으로 뿜어 나왔다. 나는 속으로 절규했다.

"하나님,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가 바닥이란 말입니까? 저는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깜깜한 거실엔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 불빛만이 반짝였고, 성에 낀 베란다 창에는 동전만 한 달과 듬성듬성 불 켜진 아파트 단지가 비쳤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하늘이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요즘 나는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억지로 잠들어도 새벽 세시, 네 시면 어김없이 깼다. 뱅글뱅글 눈알이 돌고, 머릿속은 재잘재잘 자책이 끊이질 않았다.

‘너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떨어졌니? 지지리 못난 놈...'


지난 10월, 직장을 구할려고 두 군데 회사에 처음 이력서를 넣었다. 운 좋게도 곧바로 면접 기회가 잡혔다. ‘역시, 그럼 그렇지. 명훈이, 아직 안 죽었어.’ 주말엔 도서관에서 면접 예상 질문도 뽑고 답변을 정리했다. 합격 후 다시 회사에 근무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한껏 들떴다가도, ‘3년 경력 단절'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떠올리면 금세 우울해졌다.


불안한 마음에 이력서를 몇 번이고 다시 고쳐 썼다. 부지런히 여러 회사에 지원했고, 헤드헌트에게도 따로 연락을 넣고 이력서를 챙겨 보냈다. 올해 안에 반드시 거취를 정하리라 마음먹었다.


‘직장 잡는 것쯤이야, 길어야 두서너 달이겠지'

이때까지만 해도 여유라는 것이 있었다.


첫 면접에서 불합격 통보가 왔을 때는 '처음이니 그럴 수 있잖아‘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받아들였다. 연이어 두 번째 면접마저 고배를 마시자, 애써 '원래가 나랑 안 맞는 회사였어'라며 합리화를 했지만, 순간 멍해지고 울컥 치미는 감정까지는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 후 두 달 동안 20군데 넘는 회사에 지원했다. 하지만 지난 10월에 잡혔던 두 차례 면접을 제외하고는 단 한 통의 연락이 없었다. 이런 연쇄적인(?) 거절은 평생 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다.


‘예전엔 거들떠도 안 보던 회사들인데... ’

한때 호기롭게 퇴사했던 이전 직장은 이제 감히 넘볼 수도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제 21화: 신분 정리> 참조). 새해에는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오히려 더 깊은 나락으로 나를 안내했다.

'이러다 올해를 넘기겠는데....'


12월 12일, 10월에 투고했던 논문마저 거절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심사위원 중 한 분이 신랄하게 비판했고, 다른 심사자들도 그 의견에 동조한 듯했다. 요즘은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따질 힘조차 없었다. 학생은 ‘을’이니까. 지도교수는 대책을 고민해 보겠다고 했지만, 솔직히 무슨 방도가 있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허 교수와도 점점 멀어져 갔다. 이제는 당신의 강의 관련 조교 일로 카톡이나 문자로만 가끔 연락을 할 뿐, 한 달에 한번 얼굴 뵙기도 힘들었다.


나는 이미 학교를 떠나 현장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한 상태였다(<제 25화: Fortis Fortuna Adiuvat> 참조). 시간, 돈, 경력... 이미 잃어버린 것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돌이킬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끝내 정리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사람이었다.

내가 믿었던 그 사람, 결국 남보다 못한 사람이었다.


피천득의 수필 <아사코, 1970>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나 역시 박사과정이라는 인연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던 건 아닐까. 허망한 꿈을 꾸다가, 기어코 스쳐 지나가 악연을 자초한 건 아니었는지.


며칠 전,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가족 면회가 가능하다는 소식이었다. 병원 맨 안쪽 식당에 앉아 있으면, 직원의 호출을 받은 아버지가 쭈빗쭈빗 걸어 나오셨다. 몇 달 만에 뵙는 건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짧은 안부 인사 몇 마디가 오갔다. 겨울 늦은 오후, 기우는 햇살이 아버지와 내가 마주 앉은 식당 테이블 위에 드리웠다. 공기 중에 미세한 먼지가 날파리떼처럼 정신없이 떠 다녔다. 아버지는 내가 간식으로 준비해 간 햄버거와 음료수를 드셨고, 곧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면회 종료 시간입니다."


회사는 연거푸 떨어지고, 논문은 보기 좋게 거절되고, 학교생활은 점점 꼬이고, 부모님은 병상에 계시고.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하루하루 몸이 촛농처럼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아침, 언제나 밝은 얼굴로 가정을 지켜오던 아내가 마침내 한 마디를 내뱉었다.

“별다르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해?“


빽도. 윷놀이에서 앞으로 가지 못하고, 되레 뒤로 한 칸을 가야 하는 경우.


모두가 들뜬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초.

앞으로 전진해도 모자랄 판에, 나는 빽도 신세가 되어 있었다.


p.s. 커버 이미지: 영화 <기도하는 남자, 2020>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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